열 문둥병자가 모두 고침을 받았으나 예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고, 예수께서는 감사한 한 사람에게 구원받았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구원도 있지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인하여 받는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 66:3처럼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증한 것이라며,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의 기도는 듣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미혹의 영을 주어 미혹에 넘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사 66:4).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미혹에 빠지지 않아야 하나 오히려 교회가 미혹을 받아 예수를 믿고
성경은 구원의 때가 언제인지에 대하여 ‘주께서 땅 위에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신 후’라고(롬 9:28) 말씀하고 있다. 즉 땅 위에 말씀을 이루신 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 말씀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씀이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그 말씀이 남아있다며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언제인지 계시록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는 말씀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새 신자를 전도할 때와 기존 교인들에게 교훈하는 내용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하늘나라(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말씀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등등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내용은 예수께서 어떤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으며, 교회는 무엇을 교훈하여야 하는 것인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사 65:17절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는 것이고, ‘남은 자’가 구원을 받아 그곳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인 ‘야곱’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야곱이 ‘남은 자’라며 마 4:6-7절에 ‘그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
요 8: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며 여기서 진리를 알아야 자유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야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사실에 그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교회는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림만 알고 있으면 재림을 모르게 되고, 재림을 모르면 진리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않고 진리를 듣기 싫어한다(딤후 4:3-4).
따라서 계시록을 어느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의 조건에 대한 것이기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기록된 내용을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모르고 계시록을 풀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고,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마치 어떤 이익 집단들이 사용하는 명칭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고, 또한 ‘
그렇다면 어떻게 녹이는가에 대하여 사 33:11-12절에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민족들이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베어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라며 불에 태워 녹이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 땅은 불에 녹아지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사 40:4)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이루어질 일이 ‘장래사’라는 것이고(사 42:23), 장래사를 모르면 귀머거리요 소경이기에 모두 불타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호소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곳이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이 흙으로 식물로 삼기에 그곳은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사 65:24-25). 따라서 성경의 목적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백성을 거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과실이 맺으며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한다고 하였다(계 22:2)
여기서 혼란스러운 또 다른 문제는 아브라함이 들어갔던 땅인 ‘가나안 땅’에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신학자와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한 땅’이 ‘가나안 땅’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적지가 아님을 신구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그 대표로 신약에서 행 7:5절을 보면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않으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며 가나안 땅이 유업의 목적지가 아님을 말씀하고
따라서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그곳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이 약속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이 약속대로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그곳에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벧후 1:4).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곳이 어디인지를 성경을 통해 바로 알아야 한다.2.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기독교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혼란스러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는 성경에는 신구약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과 교회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어떠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성경에 기록된 어떠한 말씀도 거짓이 없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
아합 왕이 진리의 말을 듣지 않고, 사욕을 좇았기 때문에 죽었던 것같이 오늘날도 숫자에 속아 거짓에 속고 있기에 바른 사명 자가 나와야 한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많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를 모르고 자기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초림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도 함께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모르면 거짓을 믿게 하기 때문인데, 오늘날 성도들은 거짓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도 거짓을 따라갔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담을 미혹하였
오늘날 기독교에서 혼란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음식에 관한 규제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상고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나 광야에서 음식에 관한 규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영혼 구원에는 음식에 관한 규제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애굽에서 구원받고 광야에 나왔을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규례를 주셨는데 그것이 시내 산에서의 계명이다. 계명 가운데 신 14:2-3에는 하나님의 성민에게 음식 문제가 등장한다. 즉 하나님의 성민으로 택하였기 때문에 가증한 것을 먹지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사도바울은 빌 3:20에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문제가 요 14:16에서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이기 때문인데, 오늘날 교회는 성령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초림의 성령과 재림의 성령을 혼동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뜻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보혜사 성령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요 14:17에 세상은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고, 더구나 알지도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보혜사 성령을 받을 수
호흡이 불이 되어 살아남을 자가 없는 것 같으나 사 33:15-16에 있는 자들은 높은 곳에 거하게 된다는 것으로 호흡이 불이 되지 않는 곳으로 올라가 그곳에 하나님께서 양식과 물을 공급하여 살리신다는 것이고, 이들이 사 33:17에 영광중에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 한다는 것인데, 이는 예수께서 마 16:27에 영광으로 천사들과 오신다는 것이 왕이신 예수께서 오신다는 것이고, 이때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졌기에 광활한 땅을 목도 하게 된다는 것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 패역하였던 땅을 불태우고 새롭게 하신 광활한 땅이라
사 65:1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방 사람에게 물음을 받았다는 것이고, 2절에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3절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동산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긴다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에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패역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 65:6에 하나님께서 보응을 하기 위해 다 기록해 놓았다는 것으로 우리가 생명책에도 기록이 되고 기념 책에도 기록이 되지만 보응을 위해 기록한 책에 기록되면 안
성경은 사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위에 두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행 20:24에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사도바울이 은혜 복음을 전함에도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마지막 때의 사명 자들이 생명을 걸지 않을 뿐 아니라 전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왜냐하면 사명 자의 길은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순교자 동무가 되는 것이고, 사명 자의 신앙 사상이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가는 길이 사명에
오늘날 기독교가 모두 시민권만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고전 15:2에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만 믿어도 구원받는다고 하였고, 롬 10:10에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고, 행 16:31에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였기에 초림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이는 오늘날 기독교가 구원론에 대하여 초림만 주장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혼선을 가져오게 하였고, 따라서 ‘목사님 구원이 헷갈려요’라는 책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구원에는 상급의 구원이 있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떤 행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어떠한 회개도, 어떠한 기도도, 어떠한 눈물도 없이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살아 나오는 것과 같다. 이는 죄와 허물로 죽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살리셨기에 이제는 살았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빌 3:5-6에서 율법주의자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라고 말하였으나 빌 3:7-8에는 율법도 귀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배설물로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서는 과거의 일에 중점을 두기 보다 앞으로 될 일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의 뜻을 바르게 보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조심하여야 한다.선지서에서 사명 자가 전하려는 목적을 보면 사 66:15에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초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말씀하는 것이기에 재림 때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한다는 것은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에 구약에 이미 재림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