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목련의 푸른 그늘햇살이 꽃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고 정오를 넘는다 나는매일 저것들의 생기를 빤다 밤이 오면 입술에 흰피를 묻힌채 잠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모르는 척,나는 아침을 밟으면서 싱싱하다 꽃잎 한 장 넘기는 것은내가 나를 낳는 일, 깊게 팬 쇄골의 그늘, 목젖까지 부푸는저 목련의 푸른 그늘.몸과 마음이 모두 움트는 계절이다. 곳곳에 새순들의 상큼한 인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꽃들은 또 어떠한가.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등 봄의 전령들이“안녕? 봄이야!”손짓하며 반기고 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움츠러든 어깨를 조금씩
달빛 시간바람 친구 노닐다 간외딴 산기슭 아래낡은 토담집 한 채사립문 가까이우두커니 은입사 한 줄은은하게 깃을 치는 고요의쓸쓸한 황홀 너머저 달빛, 휘영청…온몸에달그림자 하르르 ……-시집 『몇 방울의 찬란』에서* 문현미 시인 : 『시와 시학』 등단. 백석대학교 교수(백석문화예술관장). 시집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 『사랑이 돌아오는 시간』 『몇 방울의 찬란』 등 다수. 박인환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서정성이 가득한 작품이다. 자아의 고독과 함께 달과 동행하는 화자의 상반성 정서를 제시하여 심미적 융합을 잘 보여준다.시는 정답이 없다.
진심眞心생각과 느낌은옳음과 그름은바름과 굽음은깊은 속에서 우러나는진심眞心입니다참마음의 참 샘입니다-시집 『시간과 함께 머문 자리』에서* 김종기 시인: 고려대 국문과 졸업. 숭의여자고등학교 교장 명예 퇴임. 시집 『빈자리에 내리는 햇살로』 등 12권 상재. 한국장로문학상. 크리스챤 시인상 등 다수진심은 한자요 참마음은 순수 우리말이다. 생각은 사고요, 느낌은 정서다. 그처럼 옳음과 굽음이나 바름과 굽음은 서로 상반성이고, 이질적인 요소다. 그런데 화자는 모두 참마음이라는 진심으로 보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리
비망록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가난한 식사 앞에서기도를 하고밤이면 고요히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곳곳에 갈등과 분열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지구별은 아름답다. 문을 열면 꽃과 나무들 그리고 새와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이런 땅에 태어나서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마음 속으로는 사랑해야지
북가죽으로 장정을 한책심장으로 읽어라못 다 운 울음그 울림으로 쓰는어느 축생의 후생기- 동인지 『작은 詩앗 채송화, 독립서점』에서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책은 성경임이 분명하다. 시인은 성경을 읽을 땐 생기는 감명 즉 심장의 울림인 북의 기능으로 변용하고 있다. 성경을 신체 울림인 맥박의 심장으로 읽으라 한다. 그 울음은 축생의 울음이다. 즉 인간 삶에서 발생하는 울음이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읽는다는 건 거룩한 하나님 말씀이 축생 같은 인간의 북, 곧 심장을 두드리는 것이다. 시의 구조는 하늘과 축생의 만남이 가죽 책(성경)을 읽는
작은 당부채송화 피면 채송화만큼작은 키로 살자.실바람 불면 실바람만큼서로에게 붙어가자.새벽이면 서로의 잎새에안개이슬로 맺히자.물보다 낮게 허리 굽히고고개 숙이면서 흘러가자.작아지므로 커지는 것을꿈꾸지도 않고낮아지므로 높아지는 것을원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부끄럼을 안다는 건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사는 삶이지만 본의 아니게 잘못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반성이나 후회를 하는 게 양심이 있는 사람의 행동이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추악한 수단과 방법을
천국보다 낯선안개에서 꽃을 떼어내니안개만 남았다.안개 속으로누군가 떠나갔다여백만 남았다낮익은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면뿌연 안개도 곧 사라질 것이다그러면안개 밖으로 나와서더 또렷해질내가 보일 것이다-시집 『어쩌다 시간 여행』에서박남희 시인: 경인일보 서울 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 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어쩌다 시간의 여행』 등. 저서 『존재와 거울의 시학』 등 현 《아포토스》 편집주간작품 아래에 밝힌 동명의 인용 영화가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의 기법을 자주 사용한 특징을 말함으로
반성누가 그러대나는 좀 더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고누가 그러대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다보면 못 참을 것도 없다고누가 그러대살다보니 곁에 있는 많은 일들이 과분한 행운이라고누가 그러대그 사람들 곁에 내가 머물 수 있음이 축복 아니냐고누가 그러대서로 잡은 손에 36.5도가 유지됨이 최고의 행복이라고누가 그러대누가 그러대절대 누累가 되지는 말라고오늘날 우리는 성과 위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일의 시간이다. 좋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일의 시간에 올인한다. 성과를 향해 질주하다 보면 시간에 붙들리게 된다. 그것은 시간으로부터 구속 받
가로수 곤충과 이끼와 새의 집가로수,길 위에 서있지 않다면 불리지 않을 이름악기와 책 혹은 장작이 될 수있다산 채로 불탈 수 있다의지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죽은 다음의 시간도 미래여서길은 계속 되고아코디언처럼잎들이 바람을 품었다 뱉을 때새와 재와 눈앞의 길이 흩어진다어디에 내려앉아도 좋다 비처럼부서질 수 있다면짙푸르게 자라는 이름을 떼고이 세계를 향해 해머를 들고집은 지을 때보다부술 때 더 큰 소리를 낸다어둠과 빛이 번갈아잎사귀를 덮고 잠든다꿈속으로 뿌리를 내린다나무는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고잠 깬 빛과 어둠 아래로사람들이
낙엽이미지떨어지는 무게는 잴 수 없다가을의 저울로 재기 전엔중량은 미지수다눈금에 새겨지는 순금의 순도그런 무게와 빛깔쯤으로낙엽은 진다어쩌다 중량미달의 낙엽 하나그러나 그 속엔가을의 무게가 들어 있다 * 박진환 시인 : 문학박사 한서대학교 교수(역) 예술대학원 원장. 동아일보 신춘문예 《조선문학》 주간.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먼저 시어는 은유라는 걸 서로 동의하여야 한다. 일단 낙엽은 비유이고, 시인이 원래 뜻(本意)은 숨겨두고 낙엽으로 둘러대서 말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문학 용어로는 본의를 원관념이라 하고, 비
밥보다 더 큰 슬픔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슬픔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을까? 혹은 슬픔의 무게를, 슬픔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사람이 느끼는 슬픔은 저마다 달라서 어떤 슬픔이 더 큰 슬픔인지 알 수 없다. 각자 자신이 겪은 아리고 쓰라린 어떤 사연이나 사건으로 슬픔을 느낀다. 그때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 섬에 와서야 알았다.도시의 먼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음을약수터에 앉아서 알았다.내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배어 있음을섬에 와서야 알았다.아직도 황금이 남아 있음을 상처를 어루만지며나를 연단시킬 사랑이 남아 있음을섬에 와서야 알았다 -시집 『백만장자가 된 사나이』에서* 정신재 시인 : 문학박사(국민대학교) 평론가 등단(시문학)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문학평론가협회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섬은 삶의 장소를 유추하는 도시적 상황에서의 탈피 또는 거리를 둔 상황을 말한다. 탈속이나
들판은 시집이다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오전의 햇살에z 일찍 데워진 돌들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줄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나비 날개 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갓 봉지 맺은 제비꽃은초
머리 염색하다하고 싶은 일 수두룩하고오라는 데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이 여기저기아직은 젊게 보이고 싶은데제멋대로 삐죽삐죽한 새치이 구석 저 구석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하얗게 바랜 세월의 흔적자랑스러울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어붓으로 조심스레 검게 지운다옹이진 섭한 감정검은 물감으로 지운다고 저만치 달아난 젊음이 오기는 하련마는마음마저 퇴색하고 싶지는 않은 걸한 올 두 올,세수하는 마음으로 머리카락에 물감 들인다마음 속 무지개도 함께 - 《기독시문학》 2023년 상반기호에서* 김순희 시인 : 이화여대 국문과 졸. 시집: 『내 꿈은 숫자가
이만 원등단했다고, 시상식에는 꼭 가봐야겠다고 서울 달동네 사는 친구가, 스물네 시간 맞교대하고 최저임금 받는 친구가, 심야 버스 편으로 돌아가 새벽 출근할 친구가, 온돌처럼 밑바닥 따신 시를 쓰라며 건네준 구겨진 봉투 하나 꽃을 못 사 왔다고 꽃값으로 생각하라고, 종일 몸으로 덥힌 만 원 한 장 오천 원 두 장며칠 전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차가 물위에 떠서 가는 느낌이 들 만큼 비가 퍼부었다. 그리도 장대비 내렸던 그날,‘시를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는 별칭이 있는 정창기 화백을 만나러 갔다.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보니 운전
발이 손에게넌 웬 팔자 좋아 팔 끝 차지이고난 왜 맨날 저 아래 다리 밑인가?넌 늘 상큼한 스킨로션 바르는데난 왜 습한 신발 냄새나 맡아야 해?너나 나나 다 같이 땀 흘리거늘넌 뽀숭뽀숭한 수건 쓰면서난 왜 젖은 걸레라도 족한 줄 알라는 거지?너와 나 사흘만 자리 좀 바꿔보면 안될까?하늘과 땅 거꾸로 뒤집히면너 내 심정 헤아릴 수 있을까 몰라장 춘 시인 : 『인간과 문학』, 등단. 시집 『느낌표 인생』 『 출렁다리』 시는 일단 변용(變容)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은유나 상징 등 시적 수사법을 동원한 시인의 숨겨진 의도를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의 바다 어떤 돈을 맡아보면 확비린내가 난다비 오는 날우산도 사치가 되는 시장 바닥에서썩어 나가는 고등어 내장 긁어낸 손으로덥석 받아 쥔 천 원짜리날비에 젖고갯비린내에 젖고콧물 눈물 땀에 젖은 그런돈이 있다등록금으로 주려고찬물에 씻어도뜨거운 불에 다려도 영 안 가셔지는 그런비린내가 있다이런 돈이 손에 들어온 날은 가끔지느러미가 찢어진 돈과돈이 헤엄쳐 온사람의 바다가 보인다돈이면 다 해결되는 것일까. 누구는 그 돈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청부 살인마저 한다. 배금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들 대부
나에게 묻는다개꿈이라 해도 그렇지산이 품에 들다니.내가 그렇게 큰 인물이던가. 산은 문을 달지 않는데 산은 높이 앉아 멀리 내다보는데 산은 잃고 얻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데내가 그렇게 의연했던가.풀잎 이슬 한 방울바닥을 기는 개미 한 마리가산의 무게에 실리는 나일 것인데 산이 덥석 안기다니.진실로 내가 오만과 편견 털고 풀이랑 살았던가. 산이 기르는 나무같이 살자 하고사심 없이 어깨 주고 살았던가. 진짜 개꿈 꿨다고 뒤에서 빈정대는 희미한 웃음소리차마 바람소리라 말하지 못하겠네. -한국시인협회 『한국시인』 2023년호 * 감태준 시인
당신에게 말 걸기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모양새는 모양새대로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무릎도 꿇고흙 속에 마음을 묻는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네게로 다가간다당신은 참, 예쁜 꽃인공지능의 기술과 경향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AI에 지배될 것인가. 아니면 AI를 지배하며 살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만큼 인공지능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바야흐로 챗GPT 시대가 도래했다. 대화형 인공지능시대다. 사람들은 기대와 두려움을 지닌 채 챗GPT와 대화를 하며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놀라지 마세요 내 부엌에는 물과 불이 있어요 얼음과 숯불과 영하 20도와 영상 20도가 살아요 58도의 독한 술과 13도의 순한 술이 있어요 냉동고에는 치미는 분노와 살인적 치욕이 멈춘 채 정지되고 세상에 새면 안되는 일급비밀이 급냉동되어 무표정하게 굳어 있고 하나의 서랍엔 비상약이 수북하게 약 주인을 향해 위협적으로 수군거리고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밤마다 눈인사를 하고 다섯 개의 칼이 번뜩거리며 용도를 기다리고 한 방이면 돌도 깨어지는 쇠뭉치 방망이가 있고 잘게잘게 찢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