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이라면 누구나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문제는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하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행동하지 않은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에 불과하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는 잘 하는데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사순절 기간이 시작됐고, 다음 주면 고난주간이 시작된다.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힘과 용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전쟁과 기아로 고통당하는 세계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고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동시에 섬김의 종교이며, 나눔의 종교이다. 사랑과 섬김, 나눔은 한마디로 이웃에게 기대어 살라는 공동체성을 띄고 있는 말이다. 헌데 오늘의 교회는 공동체성을 상실했다. 모두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자신과 가족에게 충성하기에 바쁘다. 이는 모두가 인간성을 상실한 결과이다.성경 시편 31편23장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텍쥐페리는 "사랑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고 했다.성경 고린도전서 13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명이란 말과 숙명이란 말을 자주 듣고, 자주 한다. 운명은 앞에서 보이는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숙명은 예견치 못한 것들이 자신에게 덮쳐 피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운명보다 힘들고 어렵고 피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견치 못한 일들에 부딪친다. 그대로 덮쳐오는 고난을 당하면서, 하늘을 원망한다. 우리는 일제 36년과 6.25사변을 거치면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당시 부모들은 남의 집에 가서라도 따뜻한 밥 세끼를 먹고 살라고 해외로 입양을 보내거나, 부잣집에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일은 오고 오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인생은 고달프고, 힘든 나날들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힘들게 살지 말라고 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그것은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고, 미래로 나가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변해가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변화무상함에서 살고 있다. 한 밤을 자고나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다. 어느 곳에서는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어느 곳에서는 전쟁
2024년 갑진년 새해를 맞았다. 모두 신년을 맞아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꿈을 꾸며,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기원했다. 그리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다짐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안일과 쾌락, 탐욕과 욕망을 그대로 두고서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로 나갈 수 없다.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음란하다.우리 모두는 범죄의 수단인 손을 끊고, 발을 절단하고, 눈을 빼는 결단을 먼저 내려야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새로운 나라는 그냥
사람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너와 나 사이에 관계를 하다가 보면, 평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평안한 사람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리는 사람이고,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리지 못하면 불행만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게 평안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성경 마태복음 10장 12절과 13절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 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
노력 없는 성공은 없다, 노력 없는 운도 없다. ‘운’ 이란 글자를 거꾸로 읽으면 ‘공’이 된다. 공을 들여야만 성공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운’ 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력한 결과로 얻어진 성공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 속담에 “공든 탑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누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져 존재론적으로 살아간다, 모두가 돈을 좋아하고, 숭상한다.존재론적인 인간은 지배자의 관점, 상하의 관점, 우열의 관점에서 너와 그를 바라본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이며, 양심이라고는 찾
성경에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꿈을 가진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며, 가르침이다. 오늘 세계는 권세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분명한 것은 꿈은 미래로 나가는 소망이며, 희망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다면, 삶 자체가 무의미 할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오늘 비록 어려울지라도 내일은 잘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희망이 있다.궂은날 비가 새는 오두막집에서 살지라도 내일은 해가 뜬다는 희망이 있다. 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지 못하더라도, 가
오늘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조물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죽이고 주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전쟁은 힘없고 나약한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힘 있는 자들에 의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자신의 아성을 쌓고, 자신의 욕망을 지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백성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오히려 백성을 방패로 전쟁을 일으킨다. 여기에 주변국들이, 아니 힘 있는 강대국들이 개입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예측하는 이들이 많다. 이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서
오늘 아침 카톡에 어머니와 아들의 편지가 올라 왔다. 한마디로 옛날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이웃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너와 그가 없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정겹고 감동을 준다. 마음이 찡해 혼자 읽기에는 아쉬워 아들이 어머니에 쓴 이야기 형태의 편지를 그대로 담아본다. 미리 밝히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님의 참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대로 베어 있다. “파란 보리알 한 사발을 작은 손가락으로 만들어 들고 온 어린 아들의 곱고 고운 정성에 나는 울었다. 고사리 같은 너의 두 손을 꼬옥 안
오늘 우리사회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나와 너 그리고 그가 함께 사는 세상이다. 문제는 모두가 혼자 살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겼고, 문제가 생기고 있다. 그렇다보니 인정공동체가 깨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자만 잘 살려고 한다. 엄마찬스, 아빠찬스는 보편화 되었고, 이를 통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사회는 그들만의 세상이 구축되어가고 있다. 이들은 의과 대학와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의사와 판검사가 되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이웃을 하찮게 여긴다. 무엇보
부모에 의해서 버림받은 아이, 또 조국에 의해서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종종 SNS와 각종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오늘은 에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가족 모르게 노르웨이로 입양돼 학대 받으며 자랐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글의 내용은 70년대 위탁가정에 맡겨진 것으로 알았던 ”막내딸을 찾아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시작된다. 해외입양인 정경숙씨(노르웨이)의 이야기이다. 보도에 따르면, 아버지는 70년대 위탁가정에 맡겨진 것으로 알았던 막내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입양
오늘 새벽잠에서 깨어 기도하면서, 오늘 살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보니 괴롭고, 힘들고, 즐겁더라도 늘 감사하며 살자는 것이 나의 신조가 되었다. 그렇다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오늘 무사히 보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과 감사함을 잊은 삶을 살고 있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초저출산은 교회성장의 기초가 되는 어린이주일학교에 소멸위기를 가져다가 주고 있다. 교회도 소멸되고, 교회의 고령화는 빠르게 되고 있다. 젊은 교인이 사라지면서, 주일학교 교사 수급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 현장 목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가 성장했던 70-80년대 한국교회가 어떠한 일을 하면서, 성장했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맞벌이부부와 가난한가정의 자녀들을 돌봐주기 위해 ‘어린이선교원’이라는 것을 운영했다. 또 부유한 교회는 유치원을 운영, 교회 성장의 밑
생명을 실어 나르는 통로인 결혼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결혼 나이도 크게 늘어났다. 그것은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비율이 크게 줄어든데 반해, 30대 후반, 40대에 아이를 낳는 여성이 크게 늘어났다는 정부의 통계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소멸되는 지방자치단체, 소멸되는 교회와 학교는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미 교회는 1만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경상북도 영양군은 한때 7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그런 영양군의 인구가 1만6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영양군은 전국 228개 기초단체 중 을릉군(
대화가 없는 사회는 불통의 사회이다. 흔히 말하기를 오늘 우리사회는 정치, 종교, 문화, 남북한 등 대화가 없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한다. 특히 정치인들의 불통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여기에다 교회마저도 대화가 단절돼 교회 간, 교단 간, 단체 간에 갈등만 만연되고 있다. 한국교회를 깊숙이 들여다가 보면, 교리와 제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대화가 단절돼 불통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교회의 갈등은 교회지도자들의 이해와 욕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분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가정은 가장 위대한 문화적 산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한마디로 생명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위대한 창조적 선물이다. 그런 가정이 인간의 탐욕과 정욕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오늘날 현대사회를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5월은 가정의 달, 우리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돈이 신이 되어버리면서 본능과 혈육에 의한 가족공
5월 가정의 달 3일 KBS는 맨발로 거리를 헤맨 외국인 남매를 돌봐준 편의점 주인의 훈훈한 이야기와 임신한 외상 손님에 손을 내민 사장님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매일 같이 자살, 일가족 사망, 존속살인 등등의 사건을 접하다가 훈훈한 이 두이야기는 그래도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으로 흐르는 인정이 우리사회에 아직까지는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것이 바로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인정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웃의 관심이 없었다면,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남매는 지금까지도 거리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모두가 위선적인 종교인이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당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묻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길을 상실한 위선적인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질타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지극히 작은 형제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했다. 분명 십자가에서 살해당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고 쓰러진
종교가 무엇을 위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그 종교는 타락한 종교이며, 사치를 잃어버린 종교이다. 종교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종교는 관념으로 전락하고, 집단의식이 형성된다. 무엇을 위하는 종교인 경우, 잘못된 권력이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악용하도록 되어 있다. 종교는 무엇을 위하는 도구가 아니다. 종교는 어떤 것을 위해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써먹는다고 할 때는 틀림없이 종교는 이미 있는 것과 일치시켜 버린다. 그렇게 되면 종교의 본질은 후퇴하고,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전면에 나서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