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 이렇게 기도하라 1. 찬송635장 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 이렇게 기도하라.“주기도문”은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성령께서 감동, 감화시켜서 이끌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 있다.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절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하나님의 비밀을 성령으로 깨닫고 믿고 내 삶에 적용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로 기뻐하며 평강하며 늘 천국의 희락으로 삶의 여정을 허락하신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마5장 팔복의 사람이 되면 소금으로 내가 희생하고 녹으면 빛이신 생명의 예수님의 향기가 삶에서 나타난다. 소금은 내 자아가 깨진 만큼 빛 되신 예수님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표현된다.마태복음 하늘나라로 해븐으로 표현하다. 마가,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 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의 서론적. “무엇을 믿느냐?”라는
성경66권의 말씀은 온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미혹자, 유혹자 사탄 마귀에게 속아서 죄 가운데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반증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흘리신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성령 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나를 통해 성취되고 이루어지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이름은. 1)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창1:1, 롬1:20). 2)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이다. 언약, 계약의 하나님이다(출6:6~8), 3) 주 : 주인, 소유주, 승천 후 보좌우편에 계신다. 4) 하나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그 중에 이 세상에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22)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불법자 사탄, 마귀를 처리하시는 3단계가 있다. “하늘에서 전쟁이 있으므로 땅으로 쫓김”(계12:7~9) “무저갱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깊은 뜻은. 예수님의 뜻에 함께하여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아버지의 구원계획과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사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행하셨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내 뜻은 없다. 다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길이다. 예수님의 지식과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의지의 온전한 성품으로 사는 것으로 기도이며 대화이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이름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예수의 이름은 약속의 이름으로 권세와 능력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장9~13절)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의도가 분명이 나타나 표현되어 있다. 팔복을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가 예수님이
병사들이 고지를 향하여 돌격하고 있다. 빗발치는 탄막(彈幕)을 뚫고 병사들은 전진한다. 포복하다가는 다시 일어나서 뛰고 또 엎드리고 적의 기총소사를 피한다. 여기에 대학 동창으로서 함께 출전한 두 학도병도 한몫 끼어 있다. 그들도 고지를 향해서 헐떡이며 기어오르고 있다. 때마침 적군의 총구가 앞을 달려오는 학도병 A의 가슴을 겨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그 위험한 순간에도 학도병 A는 이미 땅에 엎드리고 그 대신 뒤따라오던 학도병 B가 공교롭게도 그 운명의 총탄을 가슴에 받고 쓰러진다.훗날 학도병 B가 국군묘지에 묻혀
필자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고 거들고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주변을 향한 교회의 입장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나름대로 분석하고 진위를 가리려 노력하면서 기독언론의 한 필(筆)로써 지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언론의 확장성의 한계와 비중있는 언론들에 의해 가려진 현실적 장벽을 넘지 못하고, 그냥 단편 단문으로 묻힌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스스로의 필력 부족을 절감하면서, 문제의식에 대한 본질적 반성과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반성으로 한 동안 필을 접었었다.다른 이들의 글이 범람하고, 수많
조물주는 인간에게 신에 가까운 온갖 재능을 다 부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걸작이라고 찬양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조물주의 모든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지구의 전시장에서 인간에게 최고의 금딱지를 붙여놓고 찬양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완제품이라고 이것을 완제품이라고 믿어서는 큰 사고를 저지를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온갖 재능을 부여할 때 그는 자신을 반역할 악마의 소질까지 집어넣어 버렸다. 작가 이 범선(李範宣) 씨는 「오발탄(誤發彈)」이라는 작품을 썼었다. 너무도 불행하게 태어난 주인공을 가리켜 조물주의 오발탄이라고 명명
목마른 대지에 부슬비가 내린다. 창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창밖에 비가 내리면 우리의 얄팍한 가슴에도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산천초목들이 모두 촉촉이 빗물에 적셔지면 그것은 우리 가슴 속에도 젖어 들어온다.이렇게 비가 내릴 때 우리 가슴에 젖어 들어오는 것은 그 차가운 빗물만은 아니다. 빗물이 젖어 들고 그리움이 젖어 들고 또 잊어버려야 했던 슬픔과 괴로움이 젖어 든다.비가 내리면 우리는 어째서 청승맞은 상상에 말려들어야 하는 것일까? 따져봐야 여기엔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빗물이 꼭 눈물 같기만 하므로 사람들은 그로부터
대중가요에서 「사랑」을 뺀다면 대중가요가 망해버릴 것이다. 그만큼 대중가요는 그 가사의 소재 반 이상이 사랑 타령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랑이 어쩌면 모두 그토록 이유 없는 한숨과 눈물로만 가득 차 있고 자존심이 다 빠져버린 굴욕적인 사상으로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버린 님을 원망하는 노래,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등 대단히 굴욕적이다. 대중들은 그처럼 자존심도 없이 서로 짝만 이루어진다면 만족하다는 사랑의 사상을 갖고 사는 것일까?이 같은 정신은 옛날의 민요에도 흔했다.시(詩)라는 것은 어떤 사상 또는 감정의 압축적인 표
죽음도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장사(情死)라는 것도 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의 지속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그 뒤에 올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 기처럼 정에 겨워 함께 수면제를 마시거나 배를 타고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거나 한강 물에 투신하거나 하는 것을 정사라고 한다. 사랑에다 죽음을 건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생명까지 건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거는 까닭은 사람이 사랑에 있어서 그만큼 진실의 극한치(極限値)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비
애정의 고백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하든 말만 했으면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 제주가 아무리 많더라도 아무 데나 남용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때도 있다. 특히 애정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사랑은 사실은 말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말보다도 더 많은 진실성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우리는 눈동자를 가리켜서 내 마음의 호수라고 부른다. 검은 눈동자는 푸르다 못해 파랗게 빛나고, 조용히 맑은 정서가 흐르는 눈
가을이란 빛바랜 나뭇잎들이 하나둘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계절이라고 우리는 부른다. 이때가 도면 모두 고독이라는 계절병을 앓는다. 일 년에 한 번씩 누구나 앓아보는 중병(重病)들, 가을은 고독하다고, 외로워 못 견디겠다고, 이런 강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은 항상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해 나가고 자기 운명을 점검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도 자연도 마치 암 3기처럼 더욱 철저한 고독을, 그 마지막 나뭇잎마저 다 떨어져 버린 앙상한 골격만 남은 나뭇가지들, 이 얼마나
‘낙서’라는 것은 ‘장난으로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글자’로 풀이되어 있다.그것은 때때로 아무 의미의 연결도 사상도 없고 마치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독백처럼 무책임한 언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 같은 무질서, 이감은 무의미가 곧 천재의 쓰린 고독을 대변(代辨)해 주는 가장 진실한 시의 형태가 아닐까?낙서는 장소에 따라 그 사람에 따라 가지가지다. 변소의 낙서에서부터 가장 지루한 강의시간에 대학노트에 갈겨버린 낙서, 그리고 소년들이 자기 손바닥에 그려버린 낙서에 이르기까지 그 장르와 주제가 가지가지다. 이러한 낙서 중에서 가장 솔
우리는 한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주의를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실존주의 작가들은 이렇게 말했었다.인간은 우주의 고아라고, 마치 허공 속에 내던져진 고아와 같은 존재라고, 이렇게 고아처럼 내던져진 인간은 낳을 때부터 혼자 낳아서 결국 자기의 모든 운명을 자기만의 판단으로 결정해 나가야만 할 고독한 운명에 빠진 것이라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기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인생 직장이 마련되어 있기도 전에 이미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양수(羊水)를 뒤집어쓰고 나와 자기 운명을 울어야 하는 인간, 이런 인간 존재를 가리켜
세계적인 작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평소에 사람들에게 기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는 ‘개인기도’라는 책을 내고 그 안에서 ‘말콤’이라는 가상의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여러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는데 다음은 그중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창조물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이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닐까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은 인간에게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인간이 손을 대면 감전이 되고 맙
결혼 생활의 실패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 러시아의 세계적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영감으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했다. 그는 악보를 들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를 찾아가 초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교수는 기교가 너무 많아 소화하기 어렵다며 거절했다.레오폴드 교수가 연주하지 못할 정도면 세상에 이 곡을 소화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차이콥스키는 그 곡을 벽장에 처박아 놓고 아예 꺼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차이콥스키를 찾아온 바이올리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