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주님은 인류의 희망이시고 생명이십니다. 진통하는 역사 가운데서 주님은 늘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세상이 암울하여 탄식할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악한 자들이 세상을 소란스럽게 할 때 주께서는 정의의 팔을 높이 들어 심판하십니다. 주께서는 탐욕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한 양심을 일깨워주십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으로 위임받을 때, 각 지파의 장로들로부터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 받는다(삼하 5:1-5). 첫째, 다윗과 겨뤘던 다른 지파의 백성들을 원수가 아닌 형제로 대해줄 것("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둘째, 각 지파 간에 허물없이 소통하게 해줄 것("전에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신 것은 세례 요한의 처형 소식을 듣고서이다. 난폭한 힘이 지배하는 시대, 사방이 어둠이어서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절망적인 시대에 광야로 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광야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시험을 받았다는 것은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비 콕스에 의하면 예수의 시험받으심은
성서는 인류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인간의 죄악에 두고 있다. 죄악의 깊이가 얼마나 깊던지 하나님께서 “그것(피조물)을 지었음을 한탄”하실 정도이다(창 6:5). 신이, 그가 지은 피조물로 인해 아픔을 겪는다는 것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관이다.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신학적 결론은 1)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사랑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이요, 2)인간의 죄악에
박잠언, 욥기, 전도서는 지혜서이다. 지혜서는 한 마디로 풍요로운 삶, 질서 있고 균형 잡힌 삶, 요즘 식으로 웰빙(well-being)의 삶을 안내하는 책이다. 그런데 지혜서마다 웰빙의 조건이 다르다. 욥기와 전도서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의 위신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때, 우리를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기사가 눈에 있었다. 지난 11월 8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굵은 쇠줄로 묶고, 비밀번호 자물쇠로 봉인한 007가방처럼 보이는 사진이 실렸다. 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ACT) 문제집이 든 가방이다. 세계 130여 개국에서 치르는 문제집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보내는 것
인간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그 시대에 강자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 있다. 강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약자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억압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고 했다. 구원의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는 을씨년스럽다. 짙푸르던 나뭇잎들은 하루가 멀다며 변하고 있다. 나뭇잎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제 역할을 다하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제 시절을 만난 듯 호기를 부리던 권력의 속살이 드러나고 보니, 온 나라가 마치 사이비 교주에게 농락당한 것 같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꼭 필요하다. 아무리 궁핍한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재물(財物)이다. 재물은 자기 생활에 꼭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매는 독성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전도서는 이를 간파하여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는 것”(전 5:13)이라고 했
신명기는 초기 이스라엘 사회의 혼잡상을 전하고 있다. 당시는 이방 종교의 영향이 컸던 관계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가증한 행위들이 백성들 사이에 성행했다. 예컨대 요술, 복술, 무당, 박수, 길흉을 말하는 자, 초혼자 등 온갖 해괴한 짓을 하는 자들이 사회 기강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기만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혼잡케 하는 이들을 모두 쫓
전쟁의 수단은 무력만 있는 게 아니다. 무력 못지않게 심리전도 있다. 출애굽 백성들이 모압 평원에 진을 치자 모압의 왕 발락은 잔뜩 겁을 먹게 된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마법사 발람을 매수해서 주술로 이스라엘을 물리칠 계략을 꾸민다. 발람은 겉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실은 마법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베드로가 잔뜩 고무돼서 예수께 물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어떨까요?”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죄 용서의 문제이다. 인류 역사는 죄의 보복 청산을 반복해왔다. 지금도 이 악순환의 유혹은
지난해 12월 28일 느닷없는 한‧일 정부 간 위안부문제 합의가 당사자들은 말할 것 없고, 대다수 국민들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안기고 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로부터 10억 엔의 돈을 받고, 다시는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돈의 성격이 모호할 뿐 아니라, 아직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자신들을 모욕한다
장이권 교수의 사마귀 이야기가 흥미롭다(2016. 8. 23., 경향). 사마귀는 주행성 포식자이다. 사마귀의 머리는 삼각형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인데, 삼각형의 양쪽 끝에 잘 발달된 겹눈을 가지고 있다. 사마귀는 뛰어난 시력 덕택에 풀숲의 무시무시한 포식자이다. 사마귀는 또 매복 포식자이다. 식물의 잎이나 꽃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먹이가 나타나면 강력한
고대 이스라엘이 권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신명기에 담겨 있다(신 17:14-20). 가나안에 정착해서 불가피 주변의 열국처럼 왕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 왕은 반듯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세우라고 한다. 다음으로 왕이 지켜야 할 덕목. 일종의 왕도인 셈인데, 첫째,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다. 둘째,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이 미혹되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연이은 고난과 억울함에도 그 성품이 굴절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산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보디발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친 대목은 자기관리에 철저한 지도자의 덕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형들을 오히려 동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인 인품에서는 원수까지 끌어안는 구원자의 모
요즘 기상청이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매번 날씨 예보가 빗나가서이다. 빗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소경 문고리잡기식이다. 차라리 주역의 날씨풀이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일까? 벌써 오래된 이야기다. 슈퍼컴퓨터 없는 게 문제이다. 슈퍼컴퓨터만 들여놓으면 하늘의 기상 변화는 손바닥 보듯이 정확할 터인데. 그래서 막대한 돈을 들여 슈퍼컴퓨터를 늘여 놨다
임진왜란 당시 왕이었던 선조는 왜군이 침략해오자 가장 먼저 달아났다. 임진강을 건너고는 배까지 불태웠다. 백성들은 그대로 남겨져 온갖 고초를 겪었다. 선조는 바다에서 왜군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에게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삭탈관직하고 고문까지 가했다. 7년의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하사한 공신록은 선조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금 곁을 지킨 호
제사장 사무엘의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사법제도를 문란케 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백성의 장로들(원로)은 이를 약점으로 삼아 평소 왕권에 대해 부정적인 사무엘에게 ‘우리도 왕을 세우겠다’며 집요하게 압박한다. 저들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권력구조 개편으로 득을 보려는 계산이다. 사무엘은 어쩔 수 없이 장로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바빌론의 벨사살이 느브갓네살을 뒤이어 왕이 되었으나, 죽음이 일상화된 세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왕은 날마다 연회를 즐겼다. 그때 경악스러운 심판의 징조가 나타난다. 연회장 촛대 맞은편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왕은 제후들, 박사들, 술사들을 시켜 그 뜻을 물었으나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