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젊은 시절의 얘기이다. 나는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 대, 아내는 고아원의 차디찬 냉돌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다. 그리고 고아들이 먹고 연명하는 대두박을 끓여 먹는 수박에 없었다. 그 대 나는 한 젊은 종교인으로서 품었던 이상(理想)이 하나의 천박한 감상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좀더 쉽게 인생
한 지주 집에 한 사람의 일꾼이 고용되어 있었다. 그는 주인과 한 지붕 밑에 살면서 하루에 한 번씩 잠깐 주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일꾼은 점점 일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는 게으른 습성이 뼛속까지 배어들어서 전혀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일꾼은 주인이 자기에게 불만임을 알고, 일은 하지 않는 채 비이만 맞추려고 했다.일꾼은 주인의 지인이나 친구들을 찾아가
서진의 문신 부현이 편찬한 태자소부잠(太子少傅箴)에 등장한 구절에 근묵자흑[近墨者黑. 近 (가까울 근). 墨 (먹 묵). 者 (놈 자). 黑 (검을 흑)]이란 말이 있다. 이는 “먹을 가까이 하다 보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사자성어로써,
세종과 소헌 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나 장차 대권을 이어받아야 하는 세자 ‘향’은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지만, 세자빈 휘빈 김씨를 통해 여자를 알게 된 세자가 두 번째로 맞이한 빈은 ‘봉빈’이었다 그러나 세자가 그를 철저하게 외면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사실 봉빈을 처음 맞이했을 때 세자는 미모가 출중한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부부간의 정을
경복궁은 조선왕조와 함께 탄생한 궁궐이다. 그래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궁궐이다. 그런데도 오백년 내내 찬밥 대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태종 이방원한테 있었다. 경복궁 홀대의 역사가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경복궁이 완공된 지 3년 뒤인 1398년. 이때까지도 경복궁은 법궁 역할을 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홍화수’(홍수전. 洪秀全, 1814년 1월 1일 ~ 1864년 6월 1일)는 식구들에게 이상한 얘기를 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며 예수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중국은 악마들에게 빼앗겼으며 지상으로 돌아가 그 악ㅂㅁ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홍화수’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성서에 나타난 예언자의 전통을 이은 예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벌여야 한다.종교개혁의 정신은 한마디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도 구약시대의 예언자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불의한 정권과 결탁해 바벨과 맘몬을 노래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고, 빌붙고, 간사한 자들과 한패가 되어서 못된 짓을 하며, 각자 자기 집단 속의 사람을 추천하면서, 나라와 백성들의 이익을 져버리며, 작은 집단 세력을 열심히 이끌면서 내외로 결탁하여 자기 사람을 각 부문에 박아 넣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일단 큰 간웅(奸雄 = 간사한 지혜가 있는 영웅)에게 이용당하면 권력을 조종해서 나라의 권력을
진담 같은 농담, 농담 같은 진담으로 종종 들리는 말이다. 어차피 작은 나라로서는 매사에 한게가 있다. 경제, 안보, 문화...무엇이든지 초강대국 미국의 그늘에 있을 바에는, 아예 ‘화끈하개’ 미국의 일부가 되자! 그래서 자랑스러운 성조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하는 편이 이익이 아니겠는가?농담이라도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웅장한 위세를 떨쳤던 ‘제국 고구려’가 대국 수와 당의 침공마저 막아낸 고구려가, 마지막에는 형제 싸움의 와중에 그야말로 허무하게 무너진 점에 대해서는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고구려 마지막을 장식한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지방을 순시하면서 그 동안 수도의 일은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맡아보
‘렉스 틸러슨’미 국무부 장관은 “한국의 만찬 초대 제의 없었다.”며 방한 당일 만찬이 없었던 이유를 두고 한·미 양국의 설명이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다.‘틸러슨’ 장관은 전날 ‘인디펜던트저널리뷰’ 인터뷰에서 “한국의 만찬 제의가 없었다.”고 말한 뒤 “마지막 순간에 그들(한국) 입장에서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피곤해 만찬을 하지 않았다’
는 ‘한문제’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뒤 23년 동안 궁궐의 원림(園林)과 수레, 말, 의복이나 장식품을 늘리지 않았다. 신민(臣民)들에게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라의 재정을 털어서 베풀었고 백성들의 복지를 도모했다. 남월 왕 ‘조타’가 스스로 황제가 되자, 문제(文帝)는 조타의 형제들을 모두 불러서 각기 후사(厚賜)하고 덕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문제는 어떻게 형법과 인덕을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확한 방향은 어는 한쪽에 치우치거나 폐하지 말며 서로 보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하늘은 음(陰)과 양(陽)의 두 기운으로 일년 사계절을 이루며, 사람은 형벌과 덕의 두 가지 법으로 다스리는 도를 이룬다. 그러므로 성인이 정권을 잡더라도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2010년 4월10일 밤 8시 KBS TV는 제33회 역사스페셜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 1884년 12월 7일 ~ 1921년 8월 13일. 아호는 고헌(固軒)) 의사에 대한 내용이 방영(放映)된 바 있다. 그 는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켜다가 사형 당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설립 기념사업으로 만주에 선교를 개시했고 1933년 제22회 총회는 북만주 강변에 사는 동포전도로 ‘한경희’ 목사를 파송했다. ‘장장림’ 휘하의 군대가 있고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대가 주둔해 있는 반면, 대한 독립 쟁취를 위하여 만주에서 투쟁하는 독립당이 있는가하면 같은 동족으로 공산당이 되어 독립당과 싸우는 무리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이 전쟁을 끝내게 하는 미국 국방부 극비 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특종 보도했다. 이 문서의 제보자는 펜타곤 페이퍼 작성에 참여한 인물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 1931~)였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제록스’ 복사기를 활용해 자료의 사본을 만들어
(일본이 침략해 오지 않을까? 두 번째)현재의 일본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장기 불황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2011년 3월에 발생한 대지진은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방사능 확산에 의한 먹거리 공포 로 생존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대지진 때 파괴된 전력시설을 복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본인으로서는 생존과 권
일본에 아직은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독도를 두고 한일 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독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먼저 일본은 평화주의자든 군국주의자든 상관없이 스스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한반도 연구에서
영화 ‘도가니’를 보셨습니까? 또한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하였고, 일부 시신은 3백~5백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그리고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 받아 36년째 운영해온, 한국 최고의 사회복지시설로 평가받은 대구광역시립희망원(희망원) 사건 등의 사건수사와 판결 등을 보고 공분이 일기도 했다. 그
당시 권부 내에서 말도 많고 사연도 않았던 골칫거리가 바로 박대통령의 큰딸 근혜양 옆에 붙어 다니던 최태민(崔太敏)이란 존재였다. ~ 근혜양에게 접근한 최씨(崔太敏)가 근혜양을 업고 ‘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후에 새마음봉사단)’ 같은 전국조직을 만들어 움직이자 세간에는 곱지 못한 여론이 등장했다.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사회봉사, 여성교육을 주도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