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에서 “때가 이르렀다. 회개하고 세레를 받으라”고 외쳤다. 소외되자, 천박한자, 가난한자, 떠돌이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목격했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
사도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파였다. 그는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스데반을 처형하는데 가담하기도 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자유로운 은총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철저한 유대교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동지였고 같은 민족인
세계화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가르쳤나. 모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 안에서 평화를 배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 물음과 답은 6월 보훈의 달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그렇다. 우리는 얘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들을 예수님은 자기 몸처럼
오늘 우리사회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이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이웃을 죽이는 사회, 사랑하는 아이를 죽이는 사회가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음란한 사회가 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산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다. 내가 앞서기 위해서 상대방을 가차 없이 짓밟아버린다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율법들은 모세 5경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다. 이 모세 5경 전체, 더 나아가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서’라고 부를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존중한다. 후기 유대교를 ‘율법종교’라고 부를 정도로 율법이 유대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교나, 기독교가 율법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성서에 나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다. ”때가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장 14-15절)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비유이다. 산상설교의 첫마디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말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접붙임을 받은 것이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한다. 비록 불순종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역사에서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
지난호에 이어 그리스도의 어머니, 새로운 가정, 그리스도의 가정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하나님나라와 철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새롭게 도래하는 새나라, 새 공동체이다. 새 공동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산고를 겪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어머니는 이 산고를 겪어야 한다.박재순 교수는 “본능과 혈육에 의한 가족공동체는 이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와 akrekfd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어머니를 향하여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다음에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네 어머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인간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로잡았다고 해서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구조가 인간의 소유욕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구조가 바로 잡히지 않고서는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타원형의 두 중심점처럼 인간의 혁신과 사회의 혁신이 성서의 죄론이 문제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은 이웃에 대한 지배와 수탈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간집단의 왜곡된 관계가 구조
성서와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서가 사회적인 갈등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죄는 사회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또 반영된다. 죄는 나에게 저지르는 것이기보다는 상대에게 저지른다. 성서에서의 죄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양종교인 불교는 인간의 내면적인 어
문명의 이기와 힘의 철학인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떡이나, 돈이나, 섹스는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은 상막하다. 떡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은 떡은 돌로 만든 떡과 다르지 않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와 복음의 자유를 주었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했다. 본래 율법자체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악한 권력과 만나면, 인간을 파멸로 끌어들인다. 율법이 나쁜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악한 권력을 유지하는 무서운 힘이 된다. 불의한 사회구조와 결합되면 불의한 사회체제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리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떤 자유에로 해방시켰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공포와 감옥 같은데서 벗어나는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좋지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실업자가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말 할 수 없다.그것
연일 북한의 미사일바사, 핵실험 등 전쟁준비에 광분한 북한의 철권정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독재자 한사람을 위해 국민 전체가 희생하는 나라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북한과의 대화단절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북한의 많은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그리운 고향을 버리고 보다 나은 삶을 중국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자유의 땅을 밟기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정의롭고 평등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 전체의 흐름이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제 침략을 경험한 우리민족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출애굽 사건에 대한 언급은 모세 5경뿐만 아니라, 시편과
성서에 나타난 사마리아인은 시종일관 상처입은자 중심으로 행동한다. 사마리아은 강도만난 자를 측은히 여겼지만,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지도 않았다. 상처 입은 자의 필요에 따라서 행동했다. 여기에는 값싼 동정도 없었다. 감상적인 진철도 없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말 그대로 성숙한 행동을 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물었을 때, 예수
어린 자녀가 사고로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하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오늘 부모들 중 아이를 죽음으로 내 모는 경우가 하루가 멀다고,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내 속에 생명이 있다면, 다른 생명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세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담에, “네 대답이 옳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토론을 배제하고, 지식의 영역에서 실천에로 옮겨 놓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잘 알고 있어도, 아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사람은 앎과 행함 사이에 높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