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올라가메밀 베갯속을 널었다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햇빛 속으로 달아난다우리 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흙의 피가 묻어 있다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가을은 외갓집
물이 말라간다.푸른 산과 들 목이 마르다.나무와 풀이 죽고, 새와 짐승이 떠나고신화 속에도 산이 살지 못한다.마른 땅에서는신성한 발자국이 없다.물의 신이 죽었으니까.- 『진안문학』 22호에서 발췌-*이운룡 시인 : 전북 진안출신. 『현대문학』 시 등단. 『월간문학』 평론 등단중부대학교 교수. 전북문학관 관장(현), 시집 『가을의 어휘』 등 14권조연현 문학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더불어 약과 더불어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장롱에 비싸고 좋은 옷도 여러 벌 가지지 못한
시작은 언제나 혼돈이다.도박과 술에 찌든 남편이 있고, 탈선의 자녀가 있다. 한 여인의 헌신과 사랑의 기도가 마침내 하늘 보좌를 움직이고, 그날부터 상설 직통전화를 통해 딸아이 등록금과 거액의 교회건축헌금, 말기에 이른 유방암까지 하늘의 권능이 개입한다. 이쯤에서 ‘할렐루야’와 ‘아멘’이 떼까마귀로 날아오르고, 전염성 강한 눈물의 바이러스가 스멀스멀 기어
사랑, 웃음, 달빛이 따뜻한나는 지금 무뇌의 터널에 갇혀 있다비방록이 지워진 무뇌아다.사람들은 자와 저울과 두승(斗升)의 노예,이 세상을 짓고 쌓고 허물 것도,오감의 이미지도 바랜 무뇌아다.세상은 화해가 없는 투쟁의 꽃이어도나는 즐겁고 외롭지 않은 기대와 상실이 죽고 노도의 꽃이 피는 무뇌,모래 위에 시간의 집을 짓는 목수다.지구가 병들고 별들이 우수수 떨
고장 난 세탁기 해체해보니갑작스런 이별 통보받고터져 나오는 울음을 입막음 했던 손수건이그를 껴안았던 소매 끝의 그리움차마 못 보내고 있다* 전해심 시인: 계간『부산시인』으로 등단숙명여고. 이화여자대학교 졸. 한얼고등학교 교사 문학이 지향하는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다. 그것은 통징(엄징)을 통한 인간의 바로 세움이다.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철저한 자기 아픔인 회
엄만 내가 왜 좋아?그냥너는 왜 엄마가 좋아?그냥 그냥이란 ‘아무 이유 없이,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시(동시)는 함축이나 응축을 생명으로 하기에 짧을수록 좋다. 함축은 의미를 많이 담았다는 뜻이고, 응축은 형식을 줄였다는 뜻이다. 그럼 그냥은 무엇을 함축하고 응축하였을까. 이 작품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의 관계를 들어 사랑의 관념적인 모습
가장 젊은 날, 오늘여태껏 보듬어가꾸어 온 시간의 타래 속에아직 살지 않은 오늘이 엮이고 있다주춤거리던 푸른 상처도그저 푸른 기억의 오늘로 되살아나오늘만이생애의 가장 푸른 젊은이였다날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오늘이라는 날이 날마다 푸른 시절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날마다 이어지는 오늘이 하루의 시간을 한정해서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거나, 당대의 시간으로 해석
누가 풍랑 이는 밤바다에 나를 던져 넣었을까불면의 밤은 고래 뱃속이다낮의 구름에 비를 예감하였더니큰 폭풍 일었다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겼다고래는 바다를 가르며 질주한다미끈거리는 밤의 위액 속에서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린다몸을 공처럼 말면밤의 발에 차인다온 밤을 굴러다닌다하나에서 백까지 세다주기도문 사도신경에 당도한다눈썹 아래 초승달 뜨고두 볼에 달빛이 흐
외마디 날 선 기도처럼빈 가슴 세우는 이름을 가지고도이물의 끝자리에 가 닿지 못한 슬픔이 저녁에 닿고 있다달빛이 풀어 놓은 은빛 실타래물결마다 비문을 받아 품고굳게 부여잡은 애착의 버릿줄*로고독한 영혼의 기척을 느끼고 있는가벗어날 수 없는구속이 아름다운 건당신 안에 온전히 갇힐 수 있기 때문이려니머잖아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물은 흐르고 나는 머문다무른 심장
대고포 마을 언덕바지 중턱에 있는 염개교회휑한 예배당에 목사님만 우둑하다가갸거겨 스무 명 남짓 주민들낯선 서양귀신 반기지 않아찬송가 외로운 염개교회 목사님은고장 난 경운기 기다리며농업기술센터에서 펴낸 수리책자 뒤적인다하느님 없이도 평온한 마을통제영 시절 군수용 소금을 굽던 곳이라염개라 이름붙인 대고포 마을에는강냉이 잘 익고 다슬기 잘 자란다경운기 수리 아니
여느 고급 뷔페에서도제일 먼저 선택하는 것이 김밥인 것은‘오늘의 특선 메뉴’에 발 치어서가 아니라촌스럽지만 나의 진면목소풍날 함께 즐거워하던 어머니의 사랑예비군 훈련 날 함께 지루해 하던 아내의 정성사랑과 정성이 함께 말아진 것이 김밥누가 말았더라도어느 칼 날 앞에서도제 속내를 사심 없이 드러내는 진정성엇비슷한 맛들을 따돌리지 않는 일반성그래서 세상에서 가
돌멩이는 변하지 않는다.언제 어디서든 구르면 구르는 대로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자기의 모습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꽃은 마지막 까지 변화한다.기지개를 펴서 봉우리를 만들고꽃잎을 벌려 향을 내며아름다움을 맘껏 펼친다.돌멩이는 변화하지 않음으로모퉁이돌이 될 수 있다.꽃은 시들음으로 인하여또 다른 열매를 맺는다.돌멩이와 꽃 그들에게 의미가 있음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달빛이 희뿌옇게 자자드는어스름 산기슭 한 자락진노랑으로 물든다어두울수록 애타는 그리움이 밤에 피어나 누굴 기다리는 걸까 꽃이 저녁까지 오므라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활짝 벌어지기 때문에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즉 낮에 피는 꽃과 달리 어둠이 꽃을 피게 하는 식물이다. 원래 귀화식물이지만 이제는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작품의 시간과 장소 설
네 안에 수많은 자아의 탐험같은 표정의 마트로시카반복 속 모든 가능성을 염두하고자과거의 사고를 비우려 하지 않는다마음을 비우면 사라질반말의 반대말까지 만들며반복 속 여려 겹의 생각으로미래로의 여행을 꿈꾼다.전해보려 하지만 부딪히는 마음그 상이한 방향같은 표정의 마트로시카를 보며문득 멀리 왔음을답이 없다는 건 묻지 말라는 뜻그만 슬픈 화장을 지우고사람 냄새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모른다 모른다 모른다내 안의 거짓 고백과 부정들 사이로소망은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이었던가파란만큼 더 투명해얼어버린 겨울 청잣빛 하늘 아래자작나무와 자작나무 사이만큼가까운 거리에서 첫 고백은기다리며 기다리며 기다리며겨울 모진 바람과차갑게 얼어있는 땅을 뚫고 나온 복수꽃의 노란 꽃잎들절박한 기도는 허공을 뚫고 나와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느릿
그럴 줄 알았다.소리 소문 없이 찾아와서도란도란 속삭이다한마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릴 것을난 첨부터 알았다고운님 머리 빗어주듯그렇게 가늘게 내리다가끝내 아리랑이 되어 사라질 줄을난 이미 알고 있었다예쁘기만 했던 우리들의 행복다 떨궈 놓고서흔적 없이 그렇게 가버릴 줄을그래도 행복 했었다언젠가 너는 소리 소문 없이다시 찾아올 테니까 시간에 속하여 변화하는
빛이 기절해버린깊은 밤으로가식 하나 버린 너 요동치듯 존재의 커튼 위에겁에 질린 두 눈긴 탄생의 아픈 숭어리라 환희의 깃발로새벽에 일어서순간을 허물어버린다 가쁜 숨 멈춘감성적인 고향에문 하나 빗장 풀려가슴 치는 한숨소리그는 가고 없다. 제목부터 수상하다. 글자 그대로 친다면 4월의 꽃이 요부(妖婦)라는 것이다. 괄호란 설명의 의미가 있다. 즉 4월의 꽃은
첫눈을 놓친 사람들은 혼자 걸었다다른 사람들은 카페에 둘씩 앉아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눈에서 시작된 얘기는 어떤 남자를 비웃는 얘기로 완결되어 가고 있었다카페는 질퍽한 목소리들로 시끄러웠고알 수 없는 음악이 웅웅거렸다읽던 곳에 손가락을 끼워 두고 책을 덮었다뒤 늦게 땅에 다다른 눈송이가 몇 있었지만첫눈은 이미 그친 후였다눈이 오지 않는 소리는 잘 들리
고목(古木)들은밤이 가장 무서운가 보다별의 뒷켠에 붙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외로움이가슴속 깊이 팬 구멍으로퉁소를 불며 그 긴 밤을 달래는 것이다지하철 열차에는고목들만 따로 앉히는 자리가 따로 있다밀치고 밀리는 고역 속에서밤새 덮고 자면외로움보다 더 힘든 무료를 짊어지고이른 아침부터갈 곳이 없어도 그냥 가는 것이다 1연의 고목과 마지막 연인 2연의 이른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