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교훈한 것들이 오늘날 목회서신서입니다. 세상의 많은 교회들을 보면 수 년 동안 세워진 교회가 한 순간에 잘못된 교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하루아침에 잘못된 교리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교회는 항상 수많은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대중가요에서 「사랑」을 뺀다면 대중가요가 망해버릴 것이다. 그만큼 대중가요는 그 가사의 소재 반 이상이 사랑 타령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랑이 어쩌면 모두 그토록 이유 없는 한숨과 눈물로만 가득 차 있고 자존심이 다 빠져버린 굴욕적인 사상으로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버린 님을 원망하는 노래,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등 대단히 굴욕적이다. 대중들은 그처럼 자존심도 없이 서로 짝만 이루어진다면 만족하다는 사랑의 사상을 갖고 사는 것일까?이 같은 정신은 옛날의 민요에도 흔했다.시(詩)라는 것은 어떤 사상 또는 감정의 압축적인 표
‘진해성’이라는 가수가 모 방송사의 ‘오디션’에서 “저는 계단을 오르는 마음으로 노력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주위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면 주위가 보입니다. 그리고 항상 계단 오를 때는 첫 계단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유투브’에서 스쳐 지나간 내용이기에 그의 모든 말을 다 기억해 낼 수는 없고 다시 찾아 듣기도 어려우나 필자에게 울림이 되었다. 아직도 서늘한 냉기의 바람은 남은 듯하나 봄기운에 얼었던 땅이 녹고 새싹이 파릇파릇 솟아오르게 하는 계절, 움츠렸던 마음들도 기지개를
한국 사회에 기독교 색채를 가진 사교나 이단에 대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이단에 대해 대체로 관망하거나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왜일까? 지금 이단 교주들이 자신 있게 자기가 신이라고 큰소리쳐도 정통교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양새다. 왜 한국교회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벗어나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교주 자신이 곧 신(神)임을 과시해도 뚜렷한 대책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 무슨 이유인지 알 길이 없다. JMS, 만민교회,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 등 이
본문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인류의 죄와 자범죄는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범죄 때문에 발생하였다. 결국 죄인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가 이 땅에 낮은 인성을 가지고 초림으로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다. 내 죄를 대신해서 저주 나무 아래 달리셨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엎드리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 은혜로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을 알았기에 이제
예수님의 앞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 해결과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모여 있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난 후에 또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사랑을 베푸는 사역이 끝나면 그 사역의 자리를 피하셨다.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11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세에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동시에 부활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사순절을 보내야 한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절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는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성경 이사야 21장4절에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曙光)이 변(變)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고 기록되어 있다. 뉴욕 타임스
기독교 전례에서 고난주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한국교회는 성금요일만 기념하지만 세족 목요일, 나사로 토요일 등도 중요한 기념일로 지킨다. 중세 교황청 시스티나 채플에서는 고난 주간의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 3시 조과(matins)를 특별하게 드렸다. 곧 예배의 진행에 따라 27개의 촛불을 하나씩 소등하여 점차 어두워지는 테네브레(Tenebrae) 미사다. 마지막 촛불이 꺼지면 교황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성가곡 미제레레(Miserere mei, Deus)를 참석자들과 함께 듣는다. 그 뜻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라틴
특히, 보스 박사는 세 가지를 대조하였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에서 독특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사역의 탁월함인데, 구약의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가 가장 기본적인 교훈이자 대조를 이룬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 13장 10-12절에서 구약시대의 성막과 제단에서 올린 제물보다 위대하신 속죄사역을 대조시킨다. “여기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은 찾는다”하는 종말론적 전망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보스 박사가 요약한 두 가지 언약에 대한 대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되어질 수 있다.첫째, 장소: 옛 언약은 땅 위에서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따라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죽음도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장사(情死)라는 것도 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의 지속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그 뒤에 올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 기처럼 정에 겨워 함께 수면제를 마시거나 배를 타고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거나 한강 물에 투신하거나 하는 것을 정사라고 한다. 사랑에다 죽음을 건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생명까지 건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거는 까닭은 사람이 사랑에 있어서 그만큼 진실의 극한치(極限値)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비
경향신문의 “유인경” 기자는 가장 중요한 태도를 요즘 유행하는 S라인의 S에서 찾아본다며, Sorry, Simple, Surprise, Sweet, 등을 말한다. 그중 “첫 번째 S는 Sorry입니다. 쿨하게 사과하십시오.”라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말 떼면 아기들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미안하다는 말을 정말 안 합니다. 지하철에서 제 발을 밟고도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댁 발이 왜 내 발밑에 깔렸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형법, 헌법보다 무서운 것이 국민정서 라고도 합니다. 국민정서가 “저 사람
초대교회를 이어온 현대 교회는 명칭과 교리 가르침의 내용은 비슷하다고는 하나 실제 초대교회의 원형과 비교하면 다른 면들이 아주 많다. 천주교 시대와 종교개혁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속화된 부분을 도려내고 치료를 한다고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자 안타까운 일이지만 옛 종교인의 치부가 다시 살아나서 교회를 구태의연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또다시 혁신과 개혁을 외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신앙의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진 종교인들이 되살아 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개혁과 거듭남을 교훈하나 이를 받아들인 교회는 원점으로 돌아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2년을 넘기면서, 영적으로 메마른 교인들의 영성회복과 침체 및 마이너스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 지역교회에게 교회성장의 동기를 부여해 주기 위한 운동이 실천사역연구원 원장 김록이 목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김록이 목사는 실천사역연구원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 지역복음화운동본부(이사장=김록이 목사, 본부장=배정식 목사)를 창립하고, 전국 순회 집회에 들어갔다. 동 운동본부는 첫 번째 집회로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대구 광진중앙교회(담임=지태동 목사)에서 연인원 1만여명이 참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갈릴리와 베다니에서 제자들과 다니시면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을 마치신 후 제자들 500여 명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다.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왜 하늘만 보고 있냐고 한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오른 이 예수님은 하늘로 영광 가운데 가신 그대로 오신다고 말한다. 낮은 인성을 가지고 초림으로 오신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 여러분, 한때 욜로(YOLO)라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내 행복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물질, 시간을 소비하는 삶의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은 ‘현재의 삶을 사는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온 우주와 모든 사람에게 임할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욜로가 현세적, 자기중심적, 세상적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을 사모하여 만나고자 했던 사람들은 어디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다. 백성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생의 말씀, 복음을 전하심으로 영혼들에게 영육의 복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날이 저물기까지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이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신 후 돌아가려고 할 때 백성들에게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모습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해
교회 건물에는 건축과 더불어 흔히들 담을 둘러치는 것은 교회 소유의 경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한 장애물로도 사용된다. 교회가 과연 벽을 쌓고 담을 둘러치는 이유가 단순히 불필요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사회 일반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표식인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알리는 단순한 표식인가 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과연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막은 철제 장막과 같이,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을 가로막은 철 기둥 장벽처럼, 아니면 대한민국 휴전선에 설치된 철조망처럼 누군가의 출입
야구 경기를 보면 심판들이 세이프나 아웃 스트라이크를 표현할 때 특이한 손동작을 한다. 이 독특한 야구의 수신호는 100년 전 언어와 청각장애를 지닌 야구 선수 ‘윌리엄 호이(William Hoy)’와 같은 이들을 돕고자 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윌리엄 호이(William Hoy)’는 말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야구 선수였다. 처음에는 '바보' 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였지만 놀림을 받을수록 그는 더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고 야구 선수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애정의 고백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하든 말만 했으면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 제주가 아무리 많더라도 아무 데나 남용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때도 있다. 특히 애정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사랑은 사실은 말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말보다도 더 많은 진실성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우리는 눈동자를 가리켜서 내 마음의 호수라고 부른다. 검은 눈동자는 푸르다 못해 파랗게 빛나고, 조용히 맑은 정서가 흐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