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30장에서 아굴이 신음하면서 찾았던 그 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타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최고의 하나님의 지혜가 되신다. 세상에 있는 지혜는 다 부분적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알려주는 지식이 아니다.“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하나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성취하신 모든 구원사건들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어느 인간도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믿어야만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간주하신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의 부족함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0-21)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예수는 하나님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지혜는 그 시작부터가 다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에, 먼저 인식에서 달라진다. 이 지혜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사람이 들어가서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도록 만든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 어리
그러나 전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활용하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버리게 되자, 특별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신현이요 둘째는 기적이며 셋째는 예언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초자연적으로 비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 특별계시는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성경에 담겨져 있다. 특별계시의
다시 출애굽기 3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모세에게 알려 주신다;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자 하되,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조상들과 관계를 맺어 오셨음을 설명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질적인 차등, 곧 거리감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완전하게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짐작조차도 할 수 없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인간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임시적이다. 인간은 수시로 변덕이 심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춰주셔서 찾아오시지 않으시면, 전혀
한 나그네의 진솔한 고백으로부터 가슴이 찡하게 전해오는 감동이 밀려들어 온다. 삶의 본질과 인생의 한계에 대한 진솔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백 삼십 년의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극심한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적인 고통들과 신앙적이며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회상과 추억이라고 본다. 형을 속여서 축복과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지만, 복
사람은 매일같이 7시간 이상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하면, 온갖 질병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한다. 건강한 생명체일수록 매일 몇 시간 동안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마치 영원한 죽음처럼 사람들은 밤마다 육체의 활동을 쉬고 꿈나라에 간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잠을 자야 한다. 모든 동물들은 잠을 자야만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데, 심지어 나무도, 풀도, 꽃
복잡한 현대인들이 처한 상황에 적합한 해답이 과연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현대인들의 갈등과 압박을 받는 심리를 파악조차 못하고 있으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각 나라로 퍼진 불교는 각각 수행의 방법이 다르고, 지향하는 세계가 모호하다. 불교 교훈이라는 것들은 전혀 일관된 체계가 없다. 그저 이 사람 저 사람이 남긴 말을 가지고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인간이 만든 종교들인류 문명과 문화의 4대 발상지라 하여 전통과 문화와 문자들의 발상지를 찾아보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들이 각 문명사회를 형성해 내려가는 원천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냉철하게 4대문명의 발상지와 그 뿌리를 형성하는 종교들을 분석해 보자. 이집트 문명, 그리스 헬레니즘, 황하문명과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등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문이요, 사람을 하늘나라에 연결된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연결해 주시는 통로이자 지름길이다. 행복한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하늘에서 오신 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영원한 행복을 다시 찾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이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은 지
하나님과의 인격적 신뢰 관계를 공격한 사탄의 집요한 미혹은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브가 하나님의 금지명령에 대해서 의심하였고 (고후 11:3), 아담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함께 금지된 과일을 먹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하나님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교통하던 곳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창세기 3장 23-24절에
인류를 구원한다는 계획과 실행과 적용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뜻을 세워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추진하시는 핵심사역이요 관심사항이다. 사람의 상상력이나 초현실세계를 다루는 형이상학에서나, 철학적 명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는 감히 인간이 상상
2.4.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관련된다.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구원은 영원 전에 이미 확정되었고, 현재에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장차 완전히 받게 될 것이다. 구원자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주관하고 있기에 이와 관련하여서 시간적인 표현도 사용된 것이다.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적인 용어로 표현하자
한 번도 눈으로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구원을 받은 증거가 확실하다. 마음 속에 가장 신뢰하고 따라가야 할 생명과 진리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이 작동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은 신비롭게도 성령께서 주시는 까닭에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
사람들은 전도의 말씀을 대체로 잘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 방법 외에는 달리 사람을 감동시키는 길이 없다. 한없이 어리석게 보이고, 무식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왜 자꾸만 전도하러 찾아오느냐, 귀찮게 그러느냐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증거하는 일을 쉬거나 멈출 수 없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권유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믿고 의존하는 것에만 매달려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달려 있다. 가정에서,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혹은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안에서, 혹은 직장이나 공장 안에서, 모두들 나름대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다 나은 생활, 더 좋은 것과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냈다. 예수는 구원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시행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예비하신 은혜를 베푸신다는 메시야 사상을 왜곡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