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기업에 의해, 영혼의 고향처럼 여겨졌던 예배당이 처참하게 파괴되고, 거리에서 예배드리는 처지임에도 세상은 무심하니 울적한 마음 가라앉지 않습니다. 우리 삼일교회를 파괴시킨 당사자 가운데 하나이거나 방조자인 은평구청은 지난 12월 1일(화) 오후 구청 마당에 성탄트리 점등식을 한다며, 관내 목사님들을 모시고 예배도 드리고, 그럴듯한 만찬도 대접했다는데,
20세기 미술혁명을 일으켰다는 피카소의 그림은 당시로서는 치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림을 그리듯이 조잡하게 그렸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어린애같이 그리는데 반세기가 걸렸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려야 잘 그리는 그림이었다. 피카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요즘 역사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 포고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좌파들이 쓴 교과서가 아닌 ‘올바로’ 쓴 ‘국정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뭘 말하는지 사람들은 안다. 그래서 싸움이 치열하다. 나라가 두 쪽 날판이다. 유다왕국이 혼란스런 정국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때이다. 그 어디에도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답답한 때에 예
이스라엘의 처음 왕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이다. 사울 진영에서 왔다는 젊은이 하나가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들고 다윗 진영을 찾아왔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이미 죽게 된 사울이 자기를 불러 죽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가져왔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다윗은 큰 충격을 받고 슬퍼하며 탄식한다.슬픔을 추스르고 난 다윗
연전에 북송 재일동포의 자녀로 탈북해서 일본에 정착한 다카야스 라는 여성의 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녀는 북한에서 자란 18년이 자신을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삶이 유복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지만, 그 같은 역경을 견뎌낸 삶이 오늘의 자신이 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노아에게 셈, 함, 야벳 등 세 아들이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여자인 하와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데, 대홍수사건 이후 노아의 이야기에서는 여자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창 9:18-29). 이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된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라는 기술은 노아가 농사를 지었다는 것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사람마다 풍성한 결실을 위해 분주하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을 어떻게 운영해야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김창주 목사(한신대)의 요셉 이야기가 흥미롭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더하다’ ‘모으다’라는 뜻이란다. 요셉은 자신의 이름처럼 덧셈-뺄셈의 연속이었고 나눗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덧셈-뺄셈은 마침내 곱셈이 되었다는 것이
사회학자인 모리 교수는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환자들을 관찰하고, 치료 과정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관찰한 환자 가운데 중년 여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방에서 나와 차가운 타일 바닥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몇 시간이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녀에 대해 무관심했다. 모리 교수는 그것이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녀가
기드온의 고사가 있다. 기드온이 장수가 되어 싸움터로 나가게 된다. 소심한 그는 어떻게든 많은 장정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장정의 수를 줄이라고 하신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장정의 수를 줄이고 줄인 기드온은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개처럼 물을 핥아 마시는 자를 제외하고 손으로 떠서 마시는 자 300명만
날선 비방과 무력시위로 뜨거웠던 휴전선이 남북당국자들의 만남으로 일단 평온을 되찾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설마 하다가 큰 불로 번지는 게 전쟁입니다.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입영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춘들의 군복인증이 무용담으로 온라인을 달구기는 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막기 위해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나무랄 게 없습
예수께서 눈멀고 벙어리 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이다. 백성들은 경이로운 반응을 보인 반면,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힐난한다. 사탄은 인간을 갖가지 고통과 질병에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복시키는 존재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하나님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해
아합은 북이스라엘 7대 왕으로 22년간 통치했으나, 가장 사악한 왕으로 정평 난 인물이다. 그는 국가 번영에 대한 의욕이 남다르게 강열했다. 그런 아합이 바알을 앞세워 전횡을 일삼을 때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 엘리야이다. 엘리야는 비를 관장하는 신은 바알이라고 믿고 있는 아합에게 실제로 비를 내리시는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왕상 17:1). 아합을
여름은 바캉스 계절이고, 축제의 계절이다.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추억을 만들고 싶은 생각으로 설레겠지만, 일상과 더위에 지친 이들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 복잡한 일들을 잠시 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하지만 삶은 잊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바캉스 기간의 축제는 ‘잊음’으로 신바람 나는 것인데, 잊지 않기 위해서 벌이
성경은 기본적으로 가뭄, 홍수, 기근, 전염병 등 갖가지 재난을 자연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죄 때문으로 믿는다. 따라서 재난 앞에 선 인간의 태도는,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는 일이다. 사실 인간에게 닥치는 대부분의 재난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은 자만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오늘의 기후변화문제, 공해문제, 환경문제, 생태계문제 등은 인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고전 13:18). 바울은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립적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적인 지혜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대표적인 예이다. 구약에서는 이 방편적인 지혜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믿었
사울이 왕이 되었을 당시는 전쟁을 하나님의 통치행위로 받아들였다. 전쟁은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전쟁에 임하는 왕이나 장수는 반듯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했다. 마침 블레셋이 막강한 병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급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사울로서는 어떻게든 전세를 바꿔야만 했다. 전쟁 개시를 위해
황교안 국무총리 지명자가 국회 인준 절차를 마치고서이다. 다음날 모 일간지 기사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그렇고, 야당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음에도, 마침내 총리가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거기다 온 나라를 두려움에 빠뜨린 전염병(메르스)으로 언론의 관심을 비켜 갔으니 그런 행운 어디 있겠느냐는 거
문학 이론 가운데 ‘외적 기호’ ‘내적 기호’라는 말이 있다. 외적 기호란 내적 기호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인 개념이다. 가령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외적 기호라면 달은 내적 기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적 기호인 달에는 관심이 없고, 외적 기호인 손가락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내용은 없고 겉만 꾸미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금하신 바가 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시대의 격변기에는 곳곳에서 종말현상이 발호한다.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나고, 도덕이 붕괴하고, 인간성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현세든 내세든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현세 가운데 내세가 있고, 내세 가운데 현세가 있다. 종말의 때가 오리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삼손은 헤라클레스처럼 괴력을 지닌 장수이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블레셋의 목을 비튼 영웅이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모범적이지가 않았다. 부모의 말도 안 듣고, 사람 패죽이기를 예사로 하며 불량배로 살았다. 억센 힘 빼고는 배울 게 없는 자이다. 그럼에도 그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쳐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불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