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이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어야 할 부모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있다. 아니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같은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국민들은 자녀 살해에 대해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계모의 폭행에 의해 아이들이 살해를 당하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른 것이어서,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가 땅에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처럼 헛된 생각을 가지고 살지 말라(에베소서 4장 17절)”이 성경구절은 분별력을 잃고,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회개)”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허망한 꿈속에서 살고 있다. 돈을 모으고, 높은 지위를 얻고,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것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조국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13살, 14살에 아이의 엄마가 된 시리아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시리아 출신 사마나와 마르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한참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부모에게 응석을 해야 할 나이에 ‘꿈 많은 소녀’ 대신, ‘엄마’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현실 앞에, 무엇이라고 변명해야 할지를 모
또 한 아이가 부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죽임’을 당한 이 아이의 ‘한의 소리’는 이 땅의 아이를 가진 부모의 공분을 일으키고, 학교마다 장기 결석하는 아이들을 조사해 대책을 강구하게 만들었다. 이 아이 역시 장기결석하면서, 담임선생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이 사건 이후 학교마다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장기간 동안 학교에 나오지
새해 벽두부터 떠돌이들에 대한 참상이 세계 언론을 통해 안방에 전해지고 있다. 지난해 터키 해변에서 주검으로 떠오른 꼬마 아일란 쿠르드의 비극이 그대로 지중해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두 살배기가 바위에 부딪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쿠르드의 죽음이후 유럽과 세계는 그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라마다 난민들에 대한 수용정책을 다시 세우기 시작
게임에 중독돼 자신의 딸을 집에 가둔 채 굶기고 상습적으로 폭행한 비정한 아버지가 구속됐다. 그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친부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증언은 아동학대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학대를 받은 아이가 학교에서 폭력을
12월 성탄의 계절에 또 하나의 비보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안방에 전달됐다. 강릉시 성산면 구산면 도로변의 한 음식물쓰레기통에서 수건에 감싸여 비닐봉지에 담겨진 갓난아이가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이 행인은 아이의 울음소리 듣고 수상히 여겨 경찰에 신고 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은 갓난아이를 신속히 병원으로 옮겨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탐심을 버리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계명은 탐심에 눈이 먼 나머지 바벨문화를 이 땅에 세우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네 이웃이 소유한 무엇이든지 탐내지
국회에서 ‘미혼부’도 쉽고 빠르게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 ‘사랑이 법’이 통과됐다. 또한 대법원은 ‘사랑이 법’으로 불리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 개정안을 2015년 11월 19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사랑이 법 개정안은 생모의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등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유전자 검사서 등을 제출,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출생신고를
얼마전 터키 보드롬 해변에서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3살)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세계 언론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쿠르디에게 집중됐다. 이 아이는 누구이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분명 쿠르디 역시 우리의 이웃이다.쿠르디의 참담한 모습은 언론을 통해 유럽사회에 알려졌다. 지중해의 떠돌이들을 거부하던 서방국가들이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시리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우리의 아이들이 신체와 정신이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 여자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 초등학교 여자 어린이부터 중·고등학교 여학생까지 모두 외모를 말해주는 몸매에 시달리고 있다.한국 아동·청소년(만 5-17세)의 과체중 비율은 남자 26.4%, 여자 14.1%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건
하나님의 피조물, 수많은 생명들이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다. 얼마 전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기(3살)의 죽음은, 전쟁과 테러를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난민들의 참상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에이란의 주검은 난민들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던 전 세계인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난민들
마음을 닫은 아이들에게 음악(기타)으로 마음을 열게하는 경찰관이 있다. 그는 마포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소속 학교전담경찰관 송준한 경위이다. 매달 2번씩 열리는 홍익대학교 인근 ‘학교폭력 예방 캠페인 거리공연장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송 경위는 이 곳에서 우리의 귀에 익숙한 가요를 들려주는 거리공연을 지난 8월부터 시작했다. 매달 2차례씩 건리공연을 갖고
현대가정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가정의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 자매, 어머니”(마가복음 3장 31-35)라고 했다.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놓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정을 떠났다. 결혼
민영 뉴스통신사 ‘뉴시스’에 실린 항공기 안에서 울어대는 입양아를 부모대신 달래고 업어서 재운 스튜어디스의 이야기는 인간성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부모에 의해서 버려진 아이, 그것도 조국에 의해서 버려진 아이를 누구도 달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스튜어디스가 보여준 사랑이야기는, 같은 민족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먼 길로 돌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철전지 원수였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민족의 피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마리아인은 바알 신당이 세워진 곳으로서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민족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인정할리가
지난 5일 아침 7시 뉴스 성남시에서 일어난 안모목사의 ‘미성년자 4명 성폭행’사건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오늘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의 참담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가슴 아프다. 한 목사의 부인이며, 한 부모 가족의 자조모임을 이끌고 있는 필자는 참담함을 넘어 통곡해야 할 일이다.이 목사는 교인들의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그 일을 놓지 않는다. 그러한 결과는 뻔하다. 유턴해서 돌아가면, 무엇인가가 보일 텐데 왜 실패를 반복하면서까지 하던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일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또한 이것은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숙제도 않고,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시키고
목회자에 대한 ‘윤리지침안’이 마련된다는데 환영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아야 하는 목회자에 대한 ‘윤리지침안’ 마련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에서 애석한 마음도 있다. 그동안 미혼모들의 자조모임을 만들어 이들의 윤택한 삶을 지원해온 필자로서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그것은 분명 역으로 말하면 목회자들의 가장 큰
70년전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에는 남성 말고도, 아낙네들이 있었다. 이들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일경의 총칼에 맞서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데 이들의 나라사랑운동에 대한 가치가 빛을 바래 우리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흔히 국민들은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애 투신한 인물로 유관순열사를 떠 올린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국민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