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자연自然나의 자정(子正)에도 너는깨어서 운다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들은 끝없는 눈밭 속을 헤맨다.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해체(解體) 되지 않는 영원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나의 자정(子正)을 부르느냐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광막(廣漠)한 자연이 되기까지는너는 무광(無光)의 죽음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幽閉)허나 世上을 깨우고
요즘 대한민국의 모습은 참담하다 못해 잔인하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는 이 땅의 아이들이 왜 계속해 주검으로 발견되는 것일까?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에 의해 살해 당했다. 그 시신은 수 년 동안 냉동고에 유기됐다. 또한 길 가던 아이가 시내버스에 치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사이비종교집단에 빠진 부모와 신도에 의해서 아이가 죽임을 당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영적리더십이다. 성경 말씀에 부합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교회를 섬길 때 좋고, 바른 리더십으로의 영적권위가 나타난다. 교회에서의 영적 리더십은 감독의 직분을 중심으로 주어져 있다. 감독은 보편적으로 오늘날 목사와 장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이 직분은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에게 주신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오늘의 정치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그것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 과정서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보여준 행동은, 한국교회사에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선교가 시작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
과도한 욕망과 충족, 소비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지구의 미래를 위협한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이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오늘날 세대의 무책임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너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한국교회는 수명을 다한 영미교
우리나라는 일제의 오랜 식민통치와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불과 수십 년 만에 눈부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했다. 이런 사례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한 사례에 속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전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룬 한국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경제발전과 민주화, 정부 개혁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등 그대로 따라하기 위해 애쓰고
한국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느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참극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 양산에서 아파트 외벽 보수 공사를 하던 인부 한 명이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아파트 입주자 중 한명이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인부들을 지탱하던 밧줄을 잘라버려, 다섯 아이를 키우
성소수자들이 주도하는 퀴어축제가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서울광장에서 열리게 된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서울광장 사용 여부를 심의하는 ‘열린광장운영 시민위원회’를 열어 동성애자들의 축제에 서울광장 사용을 승인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 붉은악마 응원으로 전세계에 각인되었던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의 서울광장이 이제는 전 세계인에게 동성애자들의 성지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먼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또 멀리 타국에서 대한민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참전한 UN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희생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
이슬람 무장세력 IS의 흉악한 범죄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엄마의 시신 밑에서 숨어있던 어린아이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가슴을 저미게 만들고 있다. 이 아이는 IS가 자신들의 최대 근거지인 이라크 모술지역을 연합군에게 내어줄 위기에 처하자 모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가운데, 한 여성의 시신 밑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다. 여성은 이 아이의 엄마였다.
세계화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가르쳤나. 모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 안에서 평화를 배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 물음과 답은 6월 보훈의 달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그렇다. 우리는 얘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들을 예수님은 자기 몸처럼
“…당신의 평화를 이 땅에 갈물처럼 끌어들이며/민족들의 평화를 개울물처럼 쏟아져 들이는 일을 이 민족에게 허락하소서/하나님의 말씀과 거짓된 말들을 분별케 하는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하나님. 우리는/이 땅에서 힘 있는 자들이 당신 앞에서 무서워 떠는 날을 대망합니다/이 땅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이 당신 앞에서 기억되는 날을 대망합니다/&
필자는 6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명명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 기도는 필자가 기도원을 개원한 이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합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참평화가 무엇인지를 골방에 앉아 묵상했다.과거에는 전쟁만 없으면, 총을 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이것을 평화라고 했다. 그것은 아
세상에 진실만으로 설득되는 것이 있는가? 간혹 “왜 나의 진심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철부지들을 본다. 진실에 설득당하고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인데 타인이 그 진실에 동의해주기를 바라고 그렇지 못하는 경우 그를 비난하거나 자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실의 수납여부는 오직 자신의 문제이고, 그 진실의 정당성과 진위도 오직 자신
방문객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만남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만남은 한
조선일보 김동섭 보건복지전문기자는 저출산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구 동력'이 해를 거듭하면서 꺼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계청의 자료를 인용해, 1980년 1440만명이던 학령인구(6~21세)가 올해 846만명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통계청은 학령인구가 2040년 640만명, 2060년엔 480만명으로 크게 줄어든다는 전망도 내 놓았다. 이
일천하기는 하지만 나름 세계문명의 발생지를 두어 곳 돌아보며 이렇듯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그 토록 찬란한 문명들이 만들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의 책 ‘도전과 응전’에서 “문명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덮쳐오는 도전에 대응해 성공함으로써 탄생하고 성장한다.”고 했다
본 문1 -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 가서 얻을지니라” (신 1:8)“약속의 땅을 받은 이스라엘”이스라엘 역사 중에 제일 위대한 역사가 가나안입니다.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이 땅을 유업으로 주리라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의 본질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평화이며, 사랑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도 크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유교에서 말하는 ‘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그것을 확대해 보면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평화’이다.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성격화 했다.그런데 기
맑은 정신을 소유한 목사다운 목사, 교회다운 교회가 없는가(?)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국민들과 교인들은 묻고 있다. 역사학자인 백낙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참 목사는 농촌교회를 섬기는 가난한 목사이며, 참 교회는 농촌의 작은교회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도시고, 농촌이고, 이런 목사님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