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간다. 신뢰는 겸손과 성실, 그리고 근면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이 신뢰를 받으면서 산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이웃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신뢰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로 서로 신뢰하고, 신뢰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사회는 서로 불신하며, 비방하며 살아간다는데 안타깝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확연하게 드러난
시편 150은 가장 알려진 시 중의 하나로 전체 시편의 절정을 이룬다. 보통 찬양의 모범으로 통한다. 시인을 따라 ‘찬양하라’를 10 차례 (두 차례 할렐루야를 포함하면 12번) 거듭 되뇌이는 동안 시편에 저절로 깊이 몰입된다. 전체 시편을 효과적으로 마무리 짓는 강력한 결론이다. 놀랍게도 시편 150은 공신력 있는 글쓰기 모범처럼 보인다. 한 때 5W 1H로 통용되던 육하(六何)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모두 6절로 이뤄진 짧은 글이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시인은 찬양을 주제로
참된 성도들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양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도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어서 교회를 이끌어 주신다. 모이는 습관을 실천하는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하며, 양육을 받는다. 이로 인해서 성도는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기도 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와 경건한 기도회, 소그룹 성경공부, 제자훈련 과정, 봉사담당자로서 맡은 부서의 행사 등에 참여하는 성도만
교회가 건물처럼 한번 세워지고 나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살아있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위험 가운데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한 이유는 에베소 교회에 위험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풀려나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에 갔는데 그곳에 어려움이 있어서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목회를 하는 디모데를 위해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기록 목적은 잘못된 교훈을 전하는 자를 경계하는 것과
가을이란 빛바랜 나뭇잎들이 하나둘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계절이라고 우리는 부른다. 이때가 도면 모두 고독이라는 계절병을 앓는다. 일 년에 한 번씩 누구나 앓아보는 중병(重病)들, 가을은 고독하다고, 외로워 못 견디겠다고, 이런 강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은 항상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해 나가고 자기 운명을 점검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도 자연도 마치 암 3기처럼 더욱 철저한 고독을, 그 마지막 나뭇잎마저 다 떨어져 버린 앙상한 골격만 남은 나뭇가지들, 이 얼마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에 열중해 있는 서양 외교관들을 보고 조선 양반이 혀를 끌끌 차면서 중얼거렸다. “한심한 양반들이군! 저런 고된 일은 하인들에게 시키면 될 터인데 말이야” 물론 남의 세계를 내 틀로서 재단해서는 안 된다(출처 : 고정식 웃기는 철학)오늘날 신자들은 기도를 하인에게 시키듯 남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물론 “그럴 수는 없지요!”라고 말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기도에 대한 다양성을 보이며, 의견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물론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
본문 1절은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아주 많은 무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 때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앉아 가르치셨고 무리들은 육지에 있으며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기회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 큰 무리 속에는 서기관들과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즉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주님은 자신을 흠집 내어 고소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듣고 있는 그들에게 어떤 요동도 없이 동일한 말씀을 전파하셨다. 그런 가운데 2절부터는 주님이 네 가지 밭에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 말씀을 받은 성도들
존경 받는 목회자로 교단 부흥에 힘쓰고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에도 크게 기여하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대표적 지도자로 꼽히던 최건호 목사(충무교회 원로)가 지난 10일 향년 87세로 소천했다. 기성 전 총회장이기도 한 고인의 장례예배는 지난 13일 시무하던 충무교회(성창용 목사)에서 교단장으로 엄수됐다.부총회장 임석웅 목사의 집례로 드린 이날 장례예배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총회임원, 교단 원로, 서울강남지방 및 충무교회 교역자·성도, 총회본부 직원 등 150여 명이 모여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부총회장 유승국 장로의 기도 후 ‘짧은 세
오늘 본문에 동방박사가 나오는데 현재로 하면 천문학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동방의 별을 연구하다가 메시아에 대해서 알게 된다. 별을 보고 별의 인도함에 따라 유대 이스라엘까지 와서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에서 당연히 태어났을 것이라 믿고 탄생한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헤롯 왕 때 유대 온 예루살렘이 지금 이 동방 박사들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고 소동이 일어난다. 자신의 왕위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헤롯 왕 입장에서는 자신이 유대인을 다스리는 왕인데 자기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누구나가 잘 인지하고 있다. 새해가 되면 새롭게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삼 일 지나면 그날이 그날처럼 되고 만다는 의미다. 그것은 생각만 새롭게 한다고 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새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교회가 새해를 맞이하는 행동 중 하나는 교단이나 연합회에서 주최하는 기도원이나 수양관에 모여서 연합 집회를 통해 새롭게 하는 방법으로 집회를 열기도 한다.그런데 그 집회가 매년 하는 형식적으로 모이는 집회가 아니라 진
벅찬 가슴과 우려 등이 뒤섞인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며 ‘예수 명가’를 생각해 본다.전도합시다! 이때 "목사님 우리 마을 어떤 교회는 전도할 때 2000원씩 주는데 그래서 사람들을 차로 실어 나른다고 해요!" 순간 그러함에도 천주교인은 급속도로 늘어만 가는데, 왜 한국교회의 전체 교인 수는 계속 줄어만 간다는 것인가? ‘김수환’ 추기경 등의 영향일까? 그런데 '2010년 3월 11일 향년 78세에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언론사들이 특종으로 보도하였었다. 그분은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 7000여 평을 김OO씨로부터 199
‘낙서’라는 것은 ‘장난으로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글자’로 풀이되어 있다.그것은 때때로 아무 의미의 연결도 사상도 없고 마치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독백처럼 무책임한 언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 같은 무질서, 이감은 무의미가 곧 천재의 쓰린 고독을 대변(代辨)해 주는 가장 진실한 시의 형태가 아닐까?낙서는 장소에 따라 그 사람에 따라 가지가지다. 변소의 낙서에서부터 가장 지루한 강의시간에 대학노트에 갈겨버린 낙서, 그리고 소년들이 자기 손바닥에 그려버린 낙서에 이르기까지 그 장르와 주제가 가지가지다. 이러한 낙서 중에서 가장 솔
바르고 참된 신앙을 가진 주의 백성들은 열심을 다해서 교회를 지키고, 믿음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살려내는 일에 각자가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바쳐야만 한다. 순교자의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교회를 살려내고 지켜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초래된 성도의 교제 단절과 예배 금지 상황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들의 교묘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통찰력 있게 살펴야 한다. 21세기, 세계교회가 처한 위기
부모가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순종’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었으니 이제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식에게 순종을 바라는 이유가 합당한 것처럼 하나님이
시편 119는 성서 통독의 최대 장애물?이다. 설교자들에게도 시편 119는 기피 대상이다. 오바댜(21절), 학개(38절), 나훔(46절), 요나(47절) 등보다 훨씬 긴 176절을 천천히 읽으면 25-30분가량 걸린다. 또한 히브리어 알파벳을 활용하여 8절을 한 연으로 삼아 22연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탈무드는 이를 두고 “8의 반복 시”라고 부른다(Berachos 4b). 외형적인 특징 말고도 본문에는 마치 숫자 8을 연상시키는 특정 낱말과 구절이 넘나든다. 시편 119 전체 176절에 ‘토라,’ 또는 여덟 개의
계묘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늘이 열렸다. 폐쇄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열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이 열렸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평화를 상실했다. 로마평화(팍스)의 소리만 곳곳에서 들린다.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남북한 민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함께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남북한 민족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76년 동안 자기 것을 지키기에 바빴다.76년 동안 남북한 민족이 화해하지 못한 것은 한민족의 자존감을 상실케 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재물은 많은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를 지나 엘림에 도착했다가 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만나 주심을 경험하고 다시 떠나 호렙 산 인근 르비딤에서 장막을 칠 때 마실 물조차 없어 갈증과 목마름이 생겼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과 사랑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인 모세와 다퉜다. 또 애굽에서의 삶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불평을 하고 모세를 원망한다. 또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시나를 의심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치셨고 노예의 삶을 살았던 애굽에서 해방시켜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모세 지도자를 통해서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은혜의 약속을 주셨다. 홍해의 물을 갈라서 육지처럼 걸어가게 한 것도 주님이 특별한 사랑의 이적이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나온 것도 이적이고 하나님이 모세 지도자를 바로 왕의 공주를 통하여 애굽의 왕자로 살아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건축 노역을 하며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돌로 하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를 보내고 성탄절을 기다린다. 혹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의 길을 우리 믿는 자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분명한 것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를 맞이할 수 있다. 성경 이사야 62장10절에서 12절에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시인은 원수들에게 꽁꽁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상황이다. 그들의 막강한 공격력이 압도적인 데다가 언어적, 심리적 비방은 두려움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처음 1-2절은 대적하는 무리가 엄청나게 많다는 시적 암시를 세 차례 언급된 히브리어 ‘םיבר’(라빔)을 활용한다. 세 번 모두 복수형으로 시인의 적대자, 치는 자, 비방하는 자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며 절망적인 현실을 강화한다. 사방이 온통 적이니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야웨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탄원시의 특징적인 구문이다. 원수들의 공격과 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