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를 못했다. 이로 인해 한국개신교는 선교의 경쟁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마저도 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개신교는 내부 집안싸움에 몰두, 성서의 중심사상인 화해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정신이 실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상 사람들은 한국개신교를 향해 각성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다사다난 했던 2014년도는 역사 속에 묻히고, 2015년 을미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해 한국사회와 교회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잃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나라 선교를 멀리한 나머지 목회자의 ‘탐욕’의 노래 소리만 들려온 결과이다. 교회가 사회를 버린 결과 하나님은 교회를 버리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본지는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12월 25일 성탄절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로 인류가 모두 축하하는 날이다. 헌데 가난하고, 소외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흥청망청 놀고 마시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세상의 풍조에 편승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말연시와 겹친
봉건주의의 신분타파에 상당부분 공헌한 한국개신교지만, 식민지 지배민족을 의식적으로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초기 한국개신교의 선교사들은 ‘영적’, ‘복음’, ‘하늘의 뜻’이라는 이름을 빌어 천박하고, 희망 없는 백성들에게 서양문화에 종속시키는 일에 급급했다. 그것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국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한국인들
성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전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21-23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맺은 계약법전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며, 그 이후 모든 헌법의 모법이 되고 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을 꾸러 와서 겉옷을 담보로 잡혔을 때는, 해가 질 때까지 품팔이해서 갚지 못하거든 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대표회장 선거와 이단규정을 둘러싸고, 한국교회연합이 딴살림을 차린 이후, 법정 공방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또한 교단장협의회도 일부교단의 인사들이 또 하나의 교단장협의회를 만들어 딴살림을 차리겠다고 나서,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분열과 갈등의 연속이다. 여기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마저도 총무선출을 둘러싸고 법정싸움에 돌입했다. 이 모든
오늘 한국교회는 100억 아니 3000억짜리 교회당이 경쟁적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수를 시멘트 속에 가두어, 가진 자들의 예수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면서, 교회당을 이들의 정서에 맞게 건축하고,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같이 변질된 교회를 풍자화 한 희곡 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로교 공룡교단의 일부지도자의 오만은, 찬송가의 분열에 이어, 한국기독교의 연합과 일치의 상징인 ‘한국기독교교단장협의회’(이하 교단장협) 마저도 분열시켰다. 연속된 분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실까(?)분열과 갈등, 그리고 다툼의 대명사로 한국교회에 각인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은, 이미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비롯한 기
성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성서에 기록된 인류의 첫 죄는 ‘살인’이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이다. 사람을 돌로 쳐 죽이든, 말로 죽이든 이 모두는 살인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 생존권 침해이며, 살인죄이다. 간음과 살인 두 가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성서에 맹장인 다윗이다
오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의 모습,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성서는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광야를 헤매던 하비루와 파나오의 세력에 반기를 든 농민들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는 선민사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 하나님의 세상은 힘이 좀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올해로 90주년을 맞았다. 교회협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고난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를 않는다. 이러한 교회협이 돈과 자리에 연연하면서, 한국교회와 우리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1924년 ‘조선예수교
한국교회도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자본주의의 가치인 큰 것, 강한 것, 힘, 승리 같은 것이 선이 되었다. 어떤 통치지도자의 구호처럼 한국기독교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면된다’는 구호를 외친다. 한마디로 적극적인 구호로 자신을 최면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형태이다. 이로 인해 가난한 교인, 하찮은 교인들은 교회의 자본주의 구호에서 밀려, 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다”는데 기독교인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목회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모든 것이 무사통과이며, 만사형통 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문창극교수가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을 빌려 일본제국주의의 반도의 침략을 정당화 해 준 것과 관련,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땅에서의 상급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상급이 클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땅에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하고 있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한국기독교의 일부 성직자와 교인들은 경제적인 욕구를 비롯하여 성적인 욕구, 바벨의 욕구, 맘몬의 욕구, 세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킬 수밖에 없는 당위성은 다른데 있지 않다. 한국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일궈 가난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로
8~90년대 민중신학자들은 목회자들을 향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의 사제’로서의 책무를 수행해야 할 목회자들이 아이들을 바다 속에 수장시키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중인 ‘유민아빠’인 김형오씨에 대해 부인과의 이혼, 아이들의 양육비 지원 중단, 어릴 적 아이
교황이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가 서울공항에 내려 처음 만난 사람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이었다. 그리고 교황의 ‘낮은 행보’는 계속됐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용산 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 노동자, 위안부 할머니, 음성 꽃동네 장애인 등을 만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를 전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목회자들은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는데 급급하고 있다. 또한 맘몬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의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상품문화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암몬신을 받아들여 자신을 신격화 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대한민국은 광복 69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2014년은 한국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기독교는 구한말을 거쳐 을사보호조약,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교회성장에만 급급해 왔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을 빌려 일본 식민지를 정당화해 주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기독교의 모습이라는데 국민들은 서글퍼 하고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했다. 즉 “탐욕을 추구하는 길, 탐욕을 채우기 위해 종교까지 오용하는 길, 힘의 철학을 신봉하는 길 등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했다. 한국교회의 일부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따르지 않고, 욕망의 상징이 되어버린 ‘바벨’을 노래하며, 한국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분명 ‘힘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