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무슨 말인가? ‘의인’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고 ‘믿음’을 ‘희망’으로 보면 다가오는 게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희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다. 세상이 혼탁하다고 절망하는 것은, 마치 포수에게 쫒기는 산짐승처럼 세상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암울하다고 상
예레미야는 참으로 끈질긴 사람이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레미야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100년 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그 땅에는 대부분이 앗수르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남왕국 유다는 바빌론 수하에 들어가 있었고, 나라의 상류층 사람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돌아올 기약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스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고 말한 바 있다.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열거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
가인과 아벨은 피를 나눈 형제이다. 그런데도 가장 치열한 경쟁 관계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 장자권 즉 ‘종주권’을 독점하고, 혼자서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다. 아벨은 사라졌다. 경쟁자의 흔적은 지워졌다. 가인은 경쟁자 없는 땅에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진다. 고독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땅은 소산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자 바리새인, 서기관 등 당시 지도층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며 비난했다. 이때 저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등이다(눅 15장). 이 모든 비유의 요점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근자에 이르러 교회 안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다툼을 교회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 법정에 제소하고, 따라서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빈번하다. 그만큼 교인들의 심성이 거칠어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회법에 대한 이해가 결핍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교회법이 세속 법처럼 정교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교회 구성원들 스스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말씀하신 바 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세상 만민을 향한 ‘복음전파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보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만민’은 본시 ‘피조물’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전파하라’는 당연히 복음의 확산으로 이해하나, 앞의 피조물
유대교에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이란 말 그대로 ‘넘어가는 절기’ ‘건너가는 절기’이다. 무엇을 넘어가는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세상에 매인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부패한 생활로부터 새로운 생활로 넘어가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신앙적인 회개와 각성을 ‘빠스카’라고 한다. ‘넘어감’의
인간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방법이 있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말로 훌륭한 행위를 입증할 수는 없다. 달콤한 말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예수께서 심판의 때, 보응의 때가 있음을 역설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말이 풍성할지라도 그 말의 진실성에 대한 심판의 때
박선숙의 [독일교육 이야기]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모리츠와 토마스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책을 읽고 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에 영재성을 나타냈다. 그들은 부모의 자상한 배려와 보호 아래서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진학하고 난 뒤 일상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스트레스 때문에 자주 아파 결석을
아버지가 가난한 광부였던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한 젊은 상원의원이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광부들이 깊은 탄광에 들어갈 때 작은 새 카나리아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이유가 특별하다. 카나리아는 예민한 호흡기를 갖고 있어서 유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광부보다 빨리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카나리아가 기침을 하고 숨 막혀하면 광부들은 빨리 탄광을 빠져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런 이가 재위 말년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향락에 빠져서 자신뿐 아니라 나라를 시궁창에 처넣게 된다. 설화자의 증언이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왕상 11:1). 이렇게 시작하는 솔로몬의 여인 편력은, 그
느헤미야 당시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졌다. 게다가 새롭게 일어나는 문화대국 그리스가 부상하면서 이스라엘은 아예 사라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저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가 바로 느헤미야 시대 사람들이다. 이런 가운데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어떻게든 이스라엘의
국내 제빵 브랜드인 파리바게뜨가 빵의 고장 프랑스 파리에 1호점 매장을 냈다고 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매장을 늘려나갈 계획이라는 포부이다. 빵맛이 좋아 그날 만든 바게트가 모두 팔렸다는 기사에는 반가움도 끼어든다. 헌데 빵집을 열기 위해 파리시청의 허가를 받기까지의 과정에 이르러서는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2006년 ‘파리바게뜨 프랑스법
근세 이후 세기적인 문명의 변화를 가져온 데는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이 그 중심에 있다.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은 ‘신의 증명’이라는 해석학적 세계관을 개척함으로써 인간의 세계 해석 능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게 됐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이 가속화 되고, 자본의 거대화가 이뤄지게 된다. 기술과 자본의 거대화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독점을 불러들이고, 신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지도층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신앙의 역사를 기록하고, 옛 율법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 성경을 그리스어로도 번역했다. 모두가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지식인들은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를 빼앗기는 죄과를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대신
국무총리 후보자였던 문창극. 그가 한때 교회에서 행한 언설로 인해 국론이 갈리는 진통을 겪었다. 그를 지지한 쪽은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으로 한 말을 악의적으로 왜곡한다는 것이고, 반대한 쪽은 그의 친일적인 발언은 총리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의 요지는 대체로, 더럽고 게으르고 자립심 없는 백성, 그의 표현대로 ‘이조 500년 동안
예수를 믿고 은혜 받은 사람은 많은데,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가? 요한이 전하는 베데스다 못에서 병 고침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요 5:1-18).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면 그보다 더 감격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쳐준 이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유대인들에게 달려가서 그가
사람마다 얻고 싶은 것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권력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권력 때문에 모략과 암투가 일어난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번은 출애굽 여정에서 레위족인 고라와 르우벤족이 파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해서 반역을 일으킨 일이 있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반역은 진압되어 참혹한 결말을 맞이한다(민16장).
초대교회에서 사랑이 시든 자리에 들어선 것은 각종 거짓 교사들 즉 영지주의자들, 분리주의자들이다. 파당을 짓는 자들이다. 거짓 교사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거나, 영적인 지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였다. 끼리끼리 모여서 사랑한다며 교회를 어지럽혔다. 요한 사도는 그런 이들을 향해, “사랑은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