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이단의 올무 씌워한국교회 이단사이비로부터 자유로운가(?)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의아해 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영미 정통주의 신학과 지배 이데올로기 신학, 근본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따르고 고수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큼은 자유롭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이 최고인양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 한국교회이다. 여기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된 것이다. 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함께 가족 여행을 나서기에 좋은 시기다. 여행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에 재충전의 기회를 가져다준다.그러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이야기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쉼’ 없는 일하는 것을 목회자의
신약에 나타난 법 정신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를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국민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원용했다.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로 적용했다. 결국 이것은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
법의 달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교회가 유독 법적인 소송에 휘말려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 없이도 잘 지낼 것 같은 교회가 각종 송사의 중심에 서있다. 이미 본지에서 수차례 다뤘듯이 마치 교회가 세상 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유행처럼 번져있다. 세상의 갈등과 다툼을 치유해야할 교회가 오히려 화해와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분열의 주체자로 전락해 버렸다. 이
성서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설정돼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
교회 분쟁이 갈수록 증대되고 세상 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유행처럼 번져가면서 이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인 교회가 갈등과 다툼의 온상처럼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이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가뜩이나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가뜩이나 한국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곤두박질한 가운데, 일부 목회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로 인해 회복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느낌이다. 사랑의 종교로 이 땅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재물과 권력에 눈이 먼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이러한 심각성을 인지한 몇몇 교단에서 목회자 윤리지침안을 총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자구책을 마련
주체성은 아가페 사랑에 의해 형성오늘 산업사회에서는 가치가 있고 유용한 사람이 아니면 낙오되고 버림을 받는다. 한마디로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질과 능률을 숭상하는 복잡한 산업문명 속에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던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오늘 한국교회에 당면한 과제 중 최우선적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는 바로 통일 문제다. 과거 통일운동의 최일선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 왔던 한국교회는 갈수록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과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올해로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지 66년, 분단 71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말하자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지 66년, 분단 71년 되었다. 이제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한국교회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북한 아니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이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우리민족에게 있어 양보할 수 없는 소원이며 염원이다. 그만큼 민족통일은
지구가 온통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마치 중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지구가 펄펄 끓고 있다. 지구온난화 여파로 전방위적인 생태계 파괴 현상이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다. 삼림지역이 광범위하게 소멸되어 평형이 깨어지고 있으며, 장차 3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될 것이라는 물부족과 식량부족 현상도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지카바이러스 등 각종 열대성 질병들이 창궐해
기독교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흉악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기독교들 향한 세인들의 비난이 또 다시 거세게 일고 있다. 아울러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제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범죄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목사이자 모 신학대학의 교수가 자신의 딸을 학대해 살해했는가 하면, 전도사였던 여자가
교회의 분열 이미 예견된 것교회의 분열은 한국선교 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역사는 처음부터 하나님나라 선교인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나오는 역사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분열의 역사였으며, 다툼의 역사였다. 1934년 찬송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교육부에 의해서 분열된 이후, 이들에 의해서 공과도 분열되었다. 이는 선교사 협의체인 선교사공의
장밋빛 연합운동의 방향 제시기득권을 가진 교회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한국교회가 하나 될 수 있다는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됐다. 그러나 이러한 제시는 권위주의의 상징인 다윗문화에 길들여지고, 종교귀족화 되어가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장밋빛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지난 12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소강당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매몰차게 인적이 드문 공터에 버리거나, 베이비박스에 넣어두거나, 심지어 인터넷 경매에 올려 팔거나 그 형태도 천차만별이다. 인간으로써 지켜야할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진 셈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이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은 부
동성애 문제가 또 다시 한국교회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 인권센터가 김조광수 감독을 초청해 이야기마당을 진행하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단체들은 행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행사 장소인 한국기독교회관 앞에서 농성과 시위를 벌이고 기자회견을 통해 교회협의 행태를 비난했다.게다가 반대측은 이야기마당이 개최
교회의 희망은 개념적이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학문적 언어서 탈피해야이스라엘이 망해갈 때 역사의 한복판에서 예언자들이 희망의 메시지 전달말의 현장은 역사의 한복판이어야그리스도의 언어는 게토화 됐다. 이제 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언어는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언어, 즉 개념적이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이다. 또 학문적이다. 이러한 언어를 가난하고,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다. 해맑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원망 섞인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세상을 향해 “우리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처절한 ‘피의 절규’는 세상의 것들에 묻혀버리고, 어른들이 정해 놓은 규정대로만 살아갈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틀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처음 한국기독교 민족공동체와 유리된 천당가는 언어만 남발논두렁과 노동판, 시장, 떠돌이 등이 모인 곳에 그물 던져야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교회 언어교회 내의 언어들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박한 사람들의 언어인가(?) 한번쯤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백성들과 유리된 천당 가는 언어만을 남발했다. 그 배후에는
여성성직자 위치 변화 곧 개혁지금까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남성에 의해서 운영되어 왔다. 이는 곧 여성들이 남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러러 흠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분위기는 여성들이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즉 여성들의 현장목회가 하늘의 별을 따는 만큼이나 어려움에 봉착되어 있다. 한마디로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