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사망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 목회자들은 SNS를 통해 용산 참사에 대해서 비난하는 글들을 퍼 나르기에 바빴다. 다음날 주일예배서 일부 목사는 용산 참사를 죄로 몰고 가는 설교를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일부 목사와 교인들은 용산 참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찾지 않고, 죄로 몰고 갔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서슴없이 “예수 믿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갔을텐데…”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설교“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하
시편 8은 경이로운 창조 세계를 노래하는 신앙고백적인 찬양이다. 본문을 조용히 읽기만 해도 은혜롭지만 시의 내용과 논리를 분석하면 역동적인 찬양을 맛볼 수 있다. 시인은 생각에 잠기는 듯한 분위기로 창조주의 영광, 피조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의 영예를 노래한다. 양식상 찬양으로 분류되나 내용은 심오하며 철학적이다. 문제는 앞뒤가 서로 모순된 채 감탄을 쏟아낸다는 점이다. 시편 8에서 세 가지 모순적 주제가 발견된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론적 모순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역설이며, 마지막으로 개인이자 공동체로 묘사되는 시인
이 책을 펴내는 마음은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하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하려는 결론은 단순하고도 명백하다. 일시적인 긴급조치로 진행되어온 비대면 영상예배가 온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수행되어야 할 정상적인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유행병으로 인한 임시 조처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동영상이나 컴퓨터나 텔레비전으로 드리는 예배가 결코 온전한 예배라고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편리한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과 목숨을 바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십 년 동안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주님에 대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생긴다고 신실하신 분의 인격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자가 편안히 사는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가운데서 성실하게 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그의 길을 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세상은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평소에 사람들에게 기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는 ‘개인기도’라는 책을 내고 그 안에서 ‘말콤’이라는 가상의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여러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는데 다음은 그중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창조물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이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닐까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은 인간에게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인간이 손을 대면 감전이 되고 맙
정확한 통계를 산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떠도는 풍문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가 아직도 점쟁이 집을 찾는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다는 사람들에게 예언을 듣기 위하여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다보니, 그러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의 권위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것 인양 포장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매년 그러하듯 ‘추수감사절’과 ‘수능시험’이 겹쳐지게 되는데,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면서도, 사찰, 무당, 유명 점집
11월15일자 인터넷 기사 중에 성공회(?) 대전 교구의 김ㅇㅇ 신부가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동남아로 전용기를 타고 출국하는 대통령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괴악한 표현을 했다. 그 내용은 윤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는 에스엔에스 내용이다. 그것도 “온 국민이 추락을 위한 염원을 모았으면 좋겠다.” 는 악담이다. 이는 일반 국민 중 한 사람이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뽑았든 저렇게 뽑았든 아니면 나와 사상과 이념이 다르던 간에 한 나라의 국가 원수의
한국교회가 다시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환경 만드는데 전력종교개혁 정신으로 장로교 신학에 충실한 신앙관 정립 필요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져 대사회적 신뢰마저 추락한 한국교회. 65세 이상 장년의 성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50년 후가 아닌 당장 10년 후 앞날부터 확신할 수 없는 암울한 한국교회. 개교회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하나 된 목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현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는 위기극복을 위해선 “목회자가 철저히 낮아지고, 자기를 비우고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성도의 마지막 부분인 성도간의 교제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성도들의 선행이 생명이 되기를 원하다고 권면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금 우리는 신약 시대에 마지막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어떻게 보면 환난 직전의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은 오순절 성령 사건을 통해서 부어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도들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 성령을 통해서 생명을 잉태하고 또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영적인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셨다.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씨앗, 이 생명체를
본문의 14~17절까지의 말씀은 성도들의 교회 안에서의 정결한 생활을 권고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죄인과 의인을 모두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마귀의 속박에서 묶여져 노예가 돼버리고 참 자유이신 예수를 몰라서 늘 불안하고 두려워 떠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통해서 건져내기 원하시고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찾고 참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은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기 위해서 15절에서는 쓴 뿌리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지도자들이 교회의 강단에서의 외침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학사 겸 선지자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면서 백성들에게 강단에서 율법을 강론하였으며, 사도행전에 베드로와 바울은 모인 무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의 복음을 증언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보게 한다. 이들이 전한 내용은 모두 율법과 복음의 순수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지도자들의 전하는 내용이 궁금하다. 순수한 복음인지 아니면 철학과 윤리와 세상의 학문을 섞은 내용
사람을 설득하는데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3대 요소가 필요하다. 로고스=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가정 하에 인간은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나 합리적인 이치가 있어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장의 일관성, 이유의 논리, 증거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짜임새 있게 제시되었냐에 따라 로고스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된다. 간혹 논리적이라는 말에 압도당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하게말해서 논리적인 것은 내용의 앞과 뒤가 모순 없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편 23은 언제 읽어도 감동을 준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그 핵심이다. 한글 번역은 아쉽다. 왜냐하면 본문과 달리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하여 시인이 체험하고 고백하는 직접적인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2인칭 ‘당신’(התא)이다. 한글은 하나님을 경어체로 부르는 전통(?) 때문에 ‘당신’ 대신에 ‘주께서’(the Lord)로 높여 부른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시편 23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시편 23의 역동성이 어떻게 4절에서 절정에 이르고
세상은 점점 어두움과 죄악의 허망함에 미쳐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들에게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어두움의 길을 동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진실을 말해줘야 합니다. 또한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가 빛을 비추고 있으면 그들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들의 갈증이 심해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비결을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빛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이 곤고해지고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결혼 생활의 실패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 러시아의 세계적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영감으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했다. 그는 악보를 들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를 찾아가 초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교수는 기교가 너무 많아 소화하기 어렵다며 거절했다.레오폴드 교수가 연주하지 못할 정도면 세상에 이 곡을 소화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차이콥스키는 그 곡을 벽장에 처박아 놓고 아예 꺼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차이콥스키를 찾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장로 요한’은 전도 여행 중, 체격이 좋고, 얼굴이 준수하며, 열렬한 정신을 가진 한 청년을 한 감독에게 소개했다. 감독은 청년을 반겨 맡고, 그 청년을 한 장로에게 부탁했다. 장로는 감독이 자기에게 맡긴 청년을 집에 데리고 돌아와 교육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 때부터 장로는 청년에 대하여 마음을 놓고, 주의와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이때 방종에 빠진 청년은 동료들을 규합하여 강도단을 조직하여, 그 단장이 되어, 그들 모두를 강폭과 피와 잔학으로서 복종케 했다.얼마의 세월이 흘렀다. 요한은 다시 감독 있는 곳을 방문하여 “나는
우리는 살면서 각자 영육으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품은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달려가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육적인 복을 받고 잘 되는 것에 더 큰 소망을 둘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자는 말씀을 통해 살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영적인 참된 안식을 누리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영적인 소망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신앙이 소망을 가지고 전진함으로 장성해져야 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심을 믿고 내
지난 1일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소재 민영교회·기도원(원장=류길자 목사)은 감사의 달을 맞아 전교인이 참여하는 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바로 밑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였다. 또한 성령의 맛을 알고, 생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간증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류길자 목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이끌고 나온 모세는 자신의 백성을 믿지 못한 죄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이스라엘 민
사람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 연고로 우리 속에서는 지옥과 어둠과 고통의 소동치는 소리들이 참 많이 들려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열방에 거하는 모든 영혼의 소리를 들으라고 우리 귀와 우리 영안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여러 가지 잘못된 것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듣지 못하고 심지어는 내 소리도 듣지 못할 때가 많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서 하룻길쯤 되는 아주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16km 쯤되는 나인성에 방문하시는데 이 동네에는 나인성 과부에게 소망이었던 독자 아들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오늘 대한민국은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남북관계 등 매우 어수선하고, 불안하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 말을 보는 듯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매몰돼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구한말 정부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외세를 불러드려, 한반도를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도, 미국과 일본을 불러드려 대한민국의 운명을 외세에 맡기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의 의문을 사고 있다.북한은 때는 이때다 하고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서해와 동해에서 방사포를 쏘아대고 있다. 국민들은 불안하다. 갈 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