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서 사랑이 시든 자리에 들어선 것은 각종 거짓 교사들 즉 영지주의자들, 분리주의자들이다. 파당을 짓는 자들이다. 거짓 교사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거나, 영적인 지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였다. 끼리끼리 모여서 사랑한다며 교회를 어지럽혔다. 요한 사도는 그런 이들을 향해, “사랑은 하나님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으로 위임받을 때의 이야기다. 다윗 이전의 이스라엘은 여러 지파로 나뉘어 원로들 즉 장로들의 협의체로 운영되었다. 다윗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따랐다. 당시 각 지파들은 왕권 중심의 국가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왕권의 강화는 바로 백성들의 노예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겼기
연전에 100억을 벌 수 있는데도 전관예우의 관행을 물리치고 야인의 자리로 내려간 이가 있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야기다. 대법관 출신으로 변호사 개업을 하면 3년 내에 그만한 돈을 벌 수 있는 데도 그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소수자 편에 서서 판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시대 그 많은 남성 법관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 반면교사로 삼는 게 이 시점에서 옳은 일인지 망설여진다. 지금도 사랑하는 이의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여, 야속한 바다를 응시하며 망연자실해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죄스런 마음이 앞서서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상징성이 너무도 크기에, ‘세월호’로 일컫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신명기에 ‘면제년’이라는 게 있다(신 15:1-11). 면제년 규범은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쉼의 명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 쉬라는 명령이다. 인간은 매 7일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인간-자연과 더불어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본시 안식일 명령은 먹을 것 걱정 없는 부자들에게 여가생활을 하라는 게 아니다. 지나친 양극화
세월호 전복은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 기울어진 배가 조류흐름이 빠른 수역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벌어진 일이다. 원래 낡은 배를 사들여 화물과 승객을 동시에 더 많이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하면서, 2층을 증축하여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갔는데도 어엿이 여객선 허가를 받아 운항했다. 20년이 넘은 노후배임에도 사용 연한을 10년이나 더 연장받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이전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큰 복이 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세계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라.”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인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성한 나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4복음서 가운데 유독 요한복음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다락방 강화’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그 온 밤을 제자들과 함께 하며 당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신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 앞의 ‘서로’를 주목해야
최후만찬 다음, 예수께서 비장한 각오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제자들 사이에 심각한 동요가 일어난다.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며 다툼이 인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고, 훈련받은 제자들이 이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어떻게든 잘 살아 보겠다’며 매달리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인간에게는 고질적인 병이
자기 삶에서 심각한 고통이 닥쳤을 때,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고민이 일 때, 욥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욥이야말로 고통을 겪으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길잡이 혹은 영혼의 맨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해 가는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욥은
시인 김승희의 가 있다.“…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인간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바벨탑 이야기는 이를 대변한다. 모든 혁명가들의 공통적인 꿈은 자신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나라의 통치자들은 국민을 선동하고 때로는 달달 볶는다. 언로를 막고 억압하기도 한다. 반대자들을 모질게 숙청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조차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며 자신의 의도
누가가 복음이 시작될 때의 어두운 시대상을 적시한 걸 보면(눅 3:1-2a),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로마, 유대라는 작은 나라를 헤롯의 세 아들이 쪼개서 통치하던 시대, 장인과 사위가 교권을 사유화해서 횡포를 부린 시대이다. 누가가 이렇게 그 시대의 어두움을 적시한 것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비록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암울한
거두절미하고, 바울은 신비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단절된 신비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궁구한 신비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다”(고전 3:17). 기독교적인 생활양식이 좋고, 성경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좋아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지만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약점이 있다. 게다가 인간에게는 욕심이라는 특유의 심리기제가 있어서 자기 생각과 행동을 확장하는 데 탁월하다. 아브람 가정의 위기는 어쩌면 여기서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래는, 아들이 있어야 안주인으로서 명예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지난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원년.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 남일당 참사에 이어, 평택 쌍룡자동차 공장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대량해고를 취소하라며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의 진압 장면이 그랬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월 7일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6월 쌍룡자동차의 노동자해고는 무효라고 판시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변할 수 있다. 교육이 있고, 훈련이 있는 것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로 굳어버린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변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를 요구하고, 거듭남을 요구한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떨까?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남 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했을 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비탄해 하며 지난날의 잘
다니엘서 이야기다. 유대는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예루살렘성전이 더럽힘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빌론의 수준 높은 문화와 경제에 힘입어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도 했다.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유대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자기도취와 향락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와중에 바빌론은 유대인을 헬라문화에 동화시켜나갔다. 유대의 준수한 젊은이들을 선
대한민국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4일 ‘2013년 사회조사’를 발표한 바 있다. 소득과 관련해서 ‘나의 사회적 지위는 하층이다’는 대답이 무려 46.7%이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층민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는 57.8%가 부정적이다.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고착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니
믿음이 식으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교회 다니기가 싫어진다. 예배가 지루하다. 헌금이 아깝다. 찬송이 기쁘지 않다. 기도가 입에서만 맴 돈다.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 ‘아멘’은 없고 불평이 늘어난다. 저 옛날 말라기 선지자 시대 백성들이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저들의 신앙은 불같이 타올랐다. 형편이 어려운 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