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조직의 승패는 그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유능한 지도자를 만난 공동체는 그 공동체성을 확립하며 발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공동체나 기업, 조직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스마트 폰 시대를 연 애플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낙오된 노키아, 최고의 전자회사로 거듭난 삼성과 그 자리를 삼성에게
우리 크리스천들은 두 줄기 역사의 교차점에서 두 가지 역사를 동시에 공유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구속하여 섭리하시고 이끄시는 역사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쌓아온 인간만의 역사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역사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세속사라 하고, 하나님이 구속하시고 섭리하여 이루시는 역사를 구속사라 부른다.
인류문명의 발흥과 쇠퇴의 과정을 환경설로 설명하려 한다. 성격, 체격, 제도 등에 영향을 미친 환경에 의하여 문명이 일어나고, 쇠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견해이다. 인종설이든, 환경설이든 모두 다른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지성이나 행동과 같은 심적, 습성의 차이가 외모, 피부색, 자연 환경과 같은 비심적 영역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인종
그리스도인이란 사전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살고, 믿는 크리스천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성경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불과 3번 밖에 없지만(행 11:26, 26:28. 벧전 4:16) 그리스도인이란 그 의미도 상기하는 바가 크고, 다양하다.사전적 의미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을 일컫는가? 바로 희망을 지닌
나이 육십을 넘기고 나니 사회 친구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미 은퇴하였고, 주변에서 은퇴를 준비하거나 은퇴하신은 목사님들의 변을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지난 4월에 은퇴하고, 시골에 내려가 나무를 가꾸며 젊음(?)을 갈구하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목사님은 “내 자리가 없다는 것도 먹먹한데, 할 일도 없다면…” 그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검붉은 유대광야에 건장한 한 사나이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짐승가죽 옷을 입고, 넘치는 힘을 주체 할 수 없는 듯이 누비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으로 태어나, 부여받은 괴력으로 어떤 싸움에서도 진적이 없는 사내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남성다움이 넘쳐났지만 크게 지혜롭지 않아 많은 실수를 하는 사내다. 자기민족을 사랑하여 민족을 괴
느헤미야는 파사(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 때,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 왕의 술을 맡는다는 것은 왕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자리였기에 충성됨과 성실함이 인정되지 않는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BC 445년 조국 이스라엘의 피폐한 소식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에게 간청하여 예루살렘 총독직을 맡아 부임한 그는 먼저 허물어진 성벽을 쌓
우리가 사는 한 평생이 그리 길지 않으나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요동치듯 흐르는 한 생(生)의 현장에서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한길을 걸어야, 바람직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의 풍조와 형편과 처지 따라 가는 길의 방향과 목적을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쉽사리 옮겨 다니는 인생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기회(?)따라 옮겨 앉는 이들의 삶은 남 보기에는 성
초대교회의 스데반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들을 백성 가운데 행할 때에 구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 중 자유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회당에 속한 몇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인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그들이 당해 낼 수 없으므로, 그들이 사람들을 매수하여 "이 사람이 모세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잘못 적용한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만은 우리민족의 축복사관에 기대어 어물 슬쩍 넘겨버려서 도저히 뒤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착근(着根)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처절하고, 비통했다. 그 사랑하는 제자들이 당신의 절망에 동참하지 않고, 그 아픔의 내용도, 분위기도 알지 못한 채 몸도 허약하고, 탈진한 엄마의 젖을 물고, 빨며, 나오지 않는 젖을 짜증내는 아이형국이다. 기름틀이라는 의미를 지닌 올리브동산,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기도하신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시도록 간절히 아버지 하나님께
다윗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자신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기도로 여호와께 물었다. 다윗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삼상 30:6) 다윗이 기도로 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용기를 주셨다. 이것이 다윗이 성공에 이를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적(政敵) 이스라엘 왕 사울은 블레
사무엘상 17장 15절에 다윗이 고향 땅 베들레헴에서 아버지가 맡긴 양떼를 돌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양떼를 지키던 때에, 때로는 곰이나 사자 혹은 늑대 같은 들짐승들이 나타나 양을 물어가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그때 다윗은 자기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돌팔매질을 익혔다. 나타난 사자나 곰을 거리를 두고 멀찍이 쫓거나 잡기 위하여 돌팔매질을 익힌 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하셨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서 이루게 하리라고도 하셨다.“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다윗의 무엇이,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을까? 다윗이 결코 허물없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여느 사람처럼 파렴치한 사람
3.1 운동의 3대 정신인 자유와 자주독립정신, 비폭력 평화정신, 불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은 지금이나 미래에나 우리가 기필코 지켜 나가야 할 민족의 지상표제가 아닐 수 없다.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자유 함이 있다고 하였다. 물
삼일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우리민족 전체가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불(火)의 선지자 엘리야(Elijah)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로서 길르앗 땅 디셉에서 태어났다(왕상 17:1).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이 왕후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곳곳에 세우고, 온 백성으로 절하게 하고 섬기게 하므로 엘리야는 아합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린 형벌로 이 땅에 수년 동안 우로(雨露)가 없을
일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들처럼 우리는 일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다. 억척같이 일하다 지치면 잠시 쉬고, 제대로 쉬기 전에 다시 일터로 달려간다. 쏘련 공산당이 생산성을 높이고 기독교의 삶의 패턴을 무너트리려고 10일을 주기로 하는 쉼을 줄이고 일하는 날과 시간을 늘리는 정책을 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리듬이 깨져 건강들은 악화되고, 생산성은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변할 수 있다. 교육이 있고, 훈련이 있는 것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로 굳어버린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변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를 요구하고, 거듭남을 요구한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떨까?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남 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했을 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비탄해 하며 지난날의 잘못
탈피(脫皮)란 파충류나 곤충류 등이 성장함에 따라 묵은 표피를 벗는 일을 말한다. 절지동물 또는 선형동물과 같이 딱딱한 큐티클(cuticle-각피)을 갖는 동물이 성장을 위해 예전의 큐티클을 한꺼번에 벗어버리는 것을 탈피라고 한다. 척추동물에서는 뱀이나 개구리의 피부 갱신과 조류의 털갈이가 탈피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대부분의 곤충은 성충이 되면 그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