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 함은 우리의 죄악(罪惡)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 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3) 아멘.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苦難) 과 죽음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절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어린나귀 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군중(群衆) 들이 길가에서 종려(棕櫚)가지를 흔들며 예 수님을 환영했던 날로부터 부활하시기 직전 까지의 1주간을 지키는 절기이다. 일반적으로 은, 경건(敬虔) 하게 보내졌으며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선진 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 그 믿음의 증거가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는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믿어야 하지만, 특히 다음 6가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시인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믿음이므로, 부모는 자녀들이 가슴 깊이 간직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모가 교사와 협력하는 일은 올바른 자녀 양육을 위해 부모 자신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라는 말씀처럼, 부모들은 자녀 양육과 교육에 교사와 공동의 책임을 지고 행동을 취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도록 한 것을, 타인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이런 양육을 받은 자녀들은 교사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소란이나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은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학생들의 모본과 격려가 될 것입니다. 즉 부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 가기 전에는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기를 바라다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는 시기가 되면 ‘공부’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됩니다. ‘공부’라는 단어와 자녀가 앞으로 거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믿음에 기초한 부모의 양육관이나 교육관을 포기하고, 믿지 않는 부모와 같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가기 쉽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의 교육 목적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자녀의 교육은 하나님께서 자녀 각자에게 주신 재능을 계발하여 하나님
한 가정이 멸망한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배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삼상2:12).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녀 교육에 무관심하여 그 아들들의 악행을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삼상2:23). 그는 가정의 아버지로서 아들들의 양육에 무관심하여 선악을 가르치지 않고, 그냥 물질만 채워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이라는 직무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여호와 하
요즈음 코로나로 인하여 어린 자녀들이 실외보다 실내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건강이 약해져 병원을 찾는 횟수가 많아진다는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실내활동 대부분이 육체적 활동보다는 정신적인 활동이 많기 때문에 아이들의 건강이 더 약해지거나 질병을 유발하게 됩니다. 즉, 육체와 지능의 발육이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건강(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마16:26).우리나라 전 지역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또는 유치원에 입학 후에 다양한 학습활동을 부모로부터
참된 교육(양육)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참사랑과 경외함을 가르치고, 건강한 체력과 지능의 조화를 꾀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육(양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집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인간이 만든 과학적 지식만 배우게 하는 것은 헛된 인생이 되기 때문에, 가장 고상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즉, 자녀들의 인생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틀 없이, 세상의 지식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
성탄절의 의미, 곧 예수님 탄생의 이유와 목적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치는 것처럼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냐 하면,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할 만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연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아이들의 마음이 기대와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하늘에는 영광이 되셨습니다. 그 평화는 이웃사랑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은 나를 제외한, 나의 주변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 친구, 이웃, 교회 형제자매들, 우리 사회, 민족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샀습니다. 한 나라가 위태로운 것은 단순히
자녀 양육에서 어떤 사람들은 ‘조건’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건적 사랑’을 우리 사회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공부를 잘하면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하지, 밥을 잘 먹으면 예쁘지, 스마트 폰을 안 하면 엄마는 행복하겠다.” 등의 표현은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행위에 따라 사랑을 주기도 하고 거두기 때문에, 사회와 달리 가정에서는 조건적 사랑이 자녀 양육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모들은 “자녀가 어릴 때, 바른 행실을 가르쳐야 늙어도 그 바른 행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22:6)”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 외에 조부모와 친척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조부모와 친척들이 자녀 양육에 긍정이나 부정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자녀의 양육은 부모가 믿음과 기본 원칙에 일관성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부모 외에 다른 사람에게 자녀 양육을 맡기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상황을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모의 책임을 대신할 수 없고,
부모는 자녀가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제자가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마16:24절에 예수님은 제자인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자아 포기, 자아 부정, 자기 파쇄 등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라는 뜻은 먼저 자신의 의지와 뜻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구와 육체의 유혹을 허락하지 않고 단호히 물리치는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사단의 권세를 섬겼던 자녀라서, 육체의 유혹에 따라 마음에 원하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바른길을 가르치라, 그러면 아이가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잠22:6). 무엇이 바른길일까요? 그것은 목표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세상 적으로 바른길은 법관, 요리사, 교사, 경찰, 연예인, 경영인 등 직업의 선택이 인생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세상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육신
우리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 살기 때문에 사회의 규범, 법, 도덕, 관습 등을 지키며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배웠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사회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법원에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판결을 받은 후에 불법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회법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회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임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의 인성에
자녀를 온유하게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도록 훈육하는 것입니다. 온유란 따스하고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온유를 유약하고 비겁하게 보는 것은 편견입니다. 특히, 우리의 부모들은 남의 온유함은 좋지만, 나의 자녀의 온유함은 싫어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유약한 느낌의 온유한 성격으로는 손해를 보는 패배자가 될 수 있어서, 부모들은 자녀를 어릴 때부터 강인하게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각은 남에게 지는 인생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거짓말,
부모는 매일 어떻게 우리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엄격하게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은 아이를 자애롭게 길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엄격함이란 아이가 잘못했을 때, 원칙에 따른 일관성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엄격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부정적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의 잘못을 무섭고 매섭게 혼내는 것을 엄격이라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부모의 지나친 엄격함은 부모의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지배와 권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녀의 잘못을 가혹하게 다루어 악한 분노를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녀 양육에 매우 유익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지구와 만물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셔서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우리가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사악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형 사고를
꾸지람이란 아랫사람의 잘못을 나무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꾸짖는다는 것은 아이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것이지, 아이의 잘못에 대해 화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의 잘못을 친절하게 타이르면서 깨우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판은 비판으로, 헤아림은 헤아림으로 부모에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마7:2).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했을 때, 부모가 응하지 않을 경우,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 땅바닥 같은 곳에 몸을 둥글거나 던질 수가 있습니다. 이때 부모는 당황하여 아이를 꾸짖거
‘성급함’이란 성질이 매우 팔팔하고 급함을 뜻합니다. 이 단어와 유사한 ‘조급함’은 성격이 참을성 없이 매우 급함을 의미합니다. 조급해지는 성질이 심해지면, 조급하게 서두르는 버릇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조급증이라는 병이 생기게 됩니다. 성급함과 조급함은 합리적인 이성이나 상황에 따른 적절한 판단보다는 여유 없이 감정적인 충동에서 오는 경향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러한 성질이 나타날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어떤 일에 대한 관찰이나 숙고보다는 지나치게 감정을 앞세워 빨리 처리하려는 조급한 마음 때문일
여러 번 언급된 말이지만, 자녀 양육에서 부모의 기본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가 이런 점을 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꿈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한 인격체로,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자녀가 이루도록 하는 꿈의 대리자, 혹은 세상에서 인기가 많은 존재로 이끌려고 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항상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자녀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어떤 잘못된 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