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대학교 문현미 교수(백석문화예술관장)가 자신의 10번째 시집 『몇 방울의 찬란』을 출간했다. 문학평론가이며, 시문학 평론가인 문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더 낮게, 더 오래 무릎을 꿇는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며, “시를 쓸 수 있어서, 시를 읽는 그대가 있어서 눈으로, 가슴으로, 온몸으로 모은 몇 방울의 시를 공손히 그대 앞에 올린다”고 말했다.시인은 생명의 계절, 부활의 계절에 ‘봄소식’이란 제목의 시에서 “바닥이 환히 드리나 보이는 호수에/물닭 몇 마리 유유히 물길을 내고 있다//날개 밑이 슬그머니 부풀어 올라/물 낯바닥이
올해 은 2월 14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 날인 30일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간이 기간이다. 24일 종려주일을 보내고, 모두가 마음을 가다듬고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한 수난일이다. 3월 마지막 주일은 고난주간이며, 31일 주일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이다.우리는 기간 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와 기도, 절제와 금식, 깊은 묵상과, 경건의 생활을 통해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한 기간 내에 주일을 제외한
시편 99는 제왕시의 하나다(시 29, 47, 93, 95-99). ‘야웨가 다스리신다,’ 또는 ‘야웨가 왕이시다’로 번역할 수 있는 야웨 말라크로 시작한다. 모빙켈은 대관식이 열리는 가을 신년 축제 때 불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는 야웨의 통치를 제의 형식으로 구현한다. 시인은 통치자의 이미지를 빌어 왕으로 등극하는 야웨의 상징적인 행위와 제의적 종말론을 적절하게 녹아낸다. 제왕시를 통하여 왕위에 오르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장차 임할 야웨의 통치와 그 약속의 성취를 미리 맛본다. 포로기의 좌절과 실의에 빠진 가운데 이사야는 ‘복되
올해 은 2월 14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 날인 30일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간이 기간이다. 24일 종려주일을 보내고, 모두가 마음을 가다듬고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한 수난일이다.3월 마지막 주일은 고난주간이며, 31일 주일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이다.우리는 기간 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와 기도, 절제와 금식, 깊은 묵상과, 경건의 생활을 통해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한 기간 내에 주일을 제외한 것
톨스토이(1828년 9월 9일~1910. 11. 20)는 남 소련(러시아) 툴라 근처의 ‘폴랴나’에서 명문가 백작의 4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절제 된 금욕주의 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는 물론 자기 성찰의 완성을 신조로 삼았다. 그는 사랑의 전령 자로 전 세계인의 복지에 기여 하려는 세계관으로, 1891년 가을 이후 기아 구제 활동에 몰두하였으며,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또한 기독교의 존재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함에 있다. 죽음과 부활을 믿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 하는데 있어야 하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그 초점을 두고 생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따르는 제자들에게 “ 누구든지 자기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3:10-12)미국 롱비치에서 한 신사가 그와 동행 중이던 젊은 숙녀를 자동차에 남겨둔 채 통닭구이 집에 들어가 통닭 한 마리를 샀다. 그런데 그 가게 주인이 실수로 통닭 상자 대신에 그날 장사해서 들어온 현금 상자를 싸서 건네주었다. 그는 은행에 예금을 하려고 거액의 돈을 빈 상자에 넣어 두었었는데, 그만 돈이 든 상자가 통닭 상자인 줄 착각하고 포장해서 손님에게 건네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3:16)한 교회학교 교사가 중등부 아이들이 성령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조사를 했다. 가장 먼저 성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다. 많은 아이가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성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이야기했다. 역시 많은 아이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신 후 함께 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길이 지금처럼 아스팔트로 된 좋은 길이 아니었고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험한 길이었다. 유대인들은 맨발로 샌들을 신었기 때문에 발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돌, 흙의 먼지 때문에 상처 나고 더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문 앞에는 물 항아리가 항상 있었고 손님의 방문 시에는 주인의 종이 와서 손님의 발을 씻겨주기도 했다. 종을 거느릴 만한 형편이 안 된 사람들은 주인이 직접 손님의 발을
오늘 카톡에 행복을 주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공유한다.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옛날사람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과의 인격적 차이, 가치관의 차이, 생활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해 준다.옛날 우리의 아버지는 힘겨웠던 시절을 어떻게 사셨을까. 당시에는 과학기술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드론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카톡도 없고, 페이스북도 없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불통의 시대, 갑갑한 세상에서 살아간 것 같이
시편 37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작성된 지혜시다. 이따금 답관체(踏冠體)라는 한자어로 설명된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각 구절의 ‘머리’[冠]에 씌워 첫 글자로 삼았다는 뜻이다. 시인은 22글자를 2절마다 하나씩 사용한다. 알파벳 순서는 시의 내용을 쉽게 연상하며 동시에 암송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주제는 의인의 보상이며(16,21,25,32,39절) 크게는 인과율이다. 저자는 전도서의 철학자일 수 있으나 생활 속의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의 도덕, 교훈을 위한 교재로 활용되었다.전체적으
이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기독인들 간의 의견이 심하게 충돌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다툼이 심화될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심히 염려된다. 특히 상대가 하는 말이 과연 성경에 부합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등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물론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념, 사상적 사고로 억지를 부리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무속, 사이비, 이단 등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
복음서에는 예수님 주변에 오랜 세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과 고난 속에 살아왔던 각색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바라보고 온 이들을 일일이 고쳐 주시면서 이 환우들이 몸이 아픈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셨다. 성경에 병을 낫게 하여 주면서 거기에 따른 대가를 수수한 기록은 없다. 기록에는 당시 병에 고생하던 자가 병을 완쾌되었을 경우 반듯이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며 보이러 갈 때는 예물을 가져가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에 예수님은 제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5:7)어느 권사님을 심방을 했을 때 권사님은 “목사님, 제 스스로 걸어서 교회에 갈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발로 설 수만 있다면, 들을 수만 있다면, 말할 수만 있다면, 볼 수만 있다면, 먹고 소화시킬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을 수만 있다면, 수술비만 있다면, 몇 개월만 더 살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의 이 같은 간절한 소망을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누리며 살고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 마가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레네 지방은 북아프리카 동북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로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인 트라폴리를 말한다. 당시에 죄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직접 지고 가야 되는 것이 법이었고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빠른 길로 인도하지 않고 되도록 사형장까지 먼 길을 돌게 한 후에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예수님도 법에 따라서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 가셨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구레네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군병들이 예수님을 사형장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한때 성공회 주교를 꿈꾸던 사무엘 브렝글이라는 미국의 목사가 구세군에 입대하려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왔다. 그때 부스 사령관은 그가 구세군에 들어오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미국에서도 존경받는 목회자이기에 높은 계급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스 대장은 브렝글에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지도자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 구세
마가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40일간의 사역, 예수님의 지상명령, 승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살한 가롯 유다를 뺀 나머지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 주님께 복음 사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가신 후에 남아있을 자신들이 받을 핍박에 대한 걱정과 육적인 삶의 안위를 더 우선시하며 근심에 쌓여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며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언15:23)“니고데모는 신분이 세리였고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중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설교가 은혜가 있어 그런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설교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동네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 나아갔으나 키가 작아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설교가 이쯤 되자 성도들이 “와”하고 웃어버렸다. 그때
한기총·한교총, 사소한 일에 묶여 통합 안 되면 한국교회 큰 손해진보와 보수 상관없이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 위해 일할 사람 중요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국가와 민족, 나아가 세계 속에서 다양하게 요구되는 도전 앞에서도 교회를 보호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대교회적, 대사회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의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갈수록 벼랑 끝에 내몰린 한국교회를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표류하고 있던 한기총을 바로 잡기 위해 두문분출하고
3.1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았다. 3.1만세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3일에 앞서 이 땅의 백성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3월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만세운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1년간 계속된 만세운동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는데 민족사적, 교회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3.1운동은 3천년간 이어져 온 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민족운동, 독립운동, 해방운동이었다.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서울과 경기도서 397차례, 황해도서 177차례, 강원도서 79차례, 충청도서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