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22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다윗의 무엇이 “내(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했을까. 다윗이 결함 없는 사람인가. 실수나 약점이 없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다윗은 일반 사람조차 저지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을 범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어서 다윗을 통해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다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에서 낳게 하심이다. “…이 사람(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마태복음 25장을 천국비유장이라 한다. 25장에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첫째는 열 처녀비유이다. 둘째는 달란트비유이고, 셋째는 양과 염소 비유이다. 이들 세 비유 중에서 달란트비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비유이다.이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처럼 쉽고, 깊고, 간결하고, 재미있다.어떤 사람이 외국에 가면서 당신의 일꾼들을 불러 각자의 역량에 따라 자기 재산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맡겼다. 세월이 흐른 후에 주인이 돌아와 일꾼들과 셈을 하신다.다섯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프랑스 낭만파 시인, 소설가 겸 극작가. 1802~1885)가 19세기 프랑스 왕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로 1862년에 발표했다. 위고의 대표작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소설 중 하나이며 서양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가난한 조카들이 굶주리자 그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 걸려 5년형을 선고받은 장 발장은 구형도중 시도한 4번의 탈옥으로 인해 총합 19년(5년+14년) 감옥살이를 한다.장 발장은 그의 전과기록으로 인해 돈이 있어
무속의 두 번째 특성은 비윤리성이다. 무당이 굿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라거나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논한 적이 없다. 이런 점이 무속신앙이 지니는 한계(限界)이다.무속에는 가치나 윤리성이 거의 없다. 가치의 기준을 찾는다면 무속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이야말로 무속의 가치개념이다. 물론 소박한 권선징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영귀를 두려워하는 무속의 태도에서 사람을 원통하게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이는 무리가 따르는 윤리성이다. 무속의 신관(神觀)에 의하면 선신(善神)
한국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을 자주 하고, 들으면서도 딱히 무슨 병에 걸려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한국교회가 병들었음이 사실이지만 죽고 살지 못할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비관적이기 보다 그 병을 고쳐 세울 치료를 생각한다. 어떤 병에 걸렸을지라도 고친 후에 병들기 전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교회의 병을 확실하게 진단하고 그 진단에 따라 처방을 하고, 그 처방을 좇아 힘을 모아 치료하여 병들기 전보다 더 건강한 교회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간구 드린다.목사로 40년을 살았다. 그 세월만큼이나 한
저 지난 해에 분주하게 살다가 고구마 순을 심는 때를 놓이고 끝자락에 놓였었다. 어떻게 해서 일정을 조정하고는 200여 평 남짓 되는 고구마 심을 밭을 찾았다. 첫날 밭에 굼벵이와 땅을 보호하는 소독제를 뿌리고, 고구마 전용 복합비료 용과린과 염화과리를 밭에 미리 뿌린 후에 동네 이장님에게 부탁해서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고 그 후 부터는 내 일이다. 이랑을 쇠스랑이로 다듬어 검은 비닐을 씌우고, 순을 심는 일을 새벽기도 후부터 그 긴 6월해가 지는 시간까지, 무려 15시간도 더 되는 동안, 저녁녘에는 발을 끌며 일을 했다. 어제부
춘원 이광수 선생이 도산안창호 선생의 전기를 쓰면서 부제를 붙이기를 “겨레를 깨우친 영원한 선각자”라고 했다. 도산선생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긴다. 우리 근세사에 도산 선생 같은 선각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대동강 연안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그가 17세 되던 해에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만나로 주셨다. 목자는 이 생명의 만나를 양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명을 가진 자이다.목자는 양을 회복시키는 일을 한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34:15-16) 양은 밥만 먹고 사는
사실 염소는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꼭 목자에게 붙어 다닐 필요가 없다. 양은 무한 약하기에 꼭 목자를 따라다녀야 하고, 그나마 혼자 다니지 못하고 떼를 지어 다녀야 한다. 성경은 염소가 길을 잃었다는 말씀이 한 번도 없다. 항상 양이 길을 잃는다.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양이다. 다른 짐승에게 다 있는 공격용, 방어용 무기도, 보호색도 없다. 다른 동물이 공격하면 속수무책이다. 그저 생존을 위한 딱 한 가지 방법은 죽으나 사나 목자를 따라다니는 것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성경의 땅 이스라엘은 목축의 땅이다. 물론 농사도 짓지만 토질이나 기후는 목축에 더 알맞다. 이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이 목자다. 이스라엘은 아열대 기후이기여서 목자는 아침 일찍 양을 데리고 들로 나간다. 목자는 항상 양들 앞에 서고,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이끌고 다니며 양을 먹인다. 목자가 양들을 한 곳에 두지 않는 것은 한 곳에서 풀을 뜯으면 양들이 풀의 뿌리까지 뜯어 먹어 그 지역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자는 온 들로 양들을 이끈다. 목자는 늘 혼자이기 때문에 외롭다. 무서운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보호해야 하니 양을 떠날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 한 기업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의 동상이다. 백화점의 창시자이자, 현대 비즈니스의 개척자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의 인생 교과서는 바로 "성경"이었다. 존 워너메이커는 서점(書店)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은 후에 1861년 남성의류품 상점 오크 홀(Oak Hall)을 필라델피아에서 시작했다. 번창하여 1869년 상호를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 Co.)로 개칭하였고, 마침내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바이러스 ‘코로나19’와 ‘코로나19’를 방역하는 정부의 대책이 우리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바꿨다. 교회의 예배 형식까지도 훈수를 하고, 신학자거나 대형교회 목사 그리고 교회 지도자라는 몇몇의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온라인예배’라는 생소한 형태가 당연한 듯이 바꾸어 놓았다. 이로 ‘주일성수’의 신앙개념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시켜버렸다.이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주일을 성수하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 그리스도인처럼 여겨지는 왜곡의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러다가 온라인예배가 고착화 되는 것이 아닌가 크게 두려워한다.‘예배당 없
성직자가 타락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목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을 성 프랜시스는 성직자가 기도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며 육체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파했다.예수님의 삶은 기도하시는 삶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쫓아 섬기고자 헌신한 우리 목사들은 기도를 게을리 한다. 사실 목사들이 기도할 시간과 여유가 없을 만큼 너무 바쁘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눅 22:39~46) 그런데 우리 성직자들, 목사들은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습관에 따라 TV 보고, 오락하고, 잡담에 어울린다. 그런 나날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하게 창조 받은 인간이 악한 마음을 갖게 된 동기는 바로 욕심이다. 눈으로 들어온 욕심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림으로 인간에게 노병사(老病死)의 아픔은 시작되었다. 욕심이 들어온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욕(虛慾)으로 극도로 부패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하신다. 대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류의 생로병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치유하는 병원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과 회복의 구원을 가르치고, 제시하고 치유하는 곳이다.병든 사
한 정치가의 이력이다.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그는 미국 켄터키 주의 가난한 농가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10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성년이 된 그는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가게 점원 등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했고,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는 일설에 의하면 두 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전한다.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보다 그 일을 접을 때가 몇 배나 힘이 든다. 일의 성과가 좋지 않아서 접는 것이겠지만 그 동안에 쌓은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자존심까지 버려야 하기 때문에 시작할 때보다 몇 배나 힘이 드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한 번 접었던 일을 다시 시작할 때는 그 일을 접을 때의 용기보다 더 수십 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까지 애써 묻고 버렸거나 생각지 못한 것들을 다시 살려야하고, 거기에 더해 지난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처럼 재도전이란 어렵고도 어려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패가 두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 1813~1855)는 개인의 체험과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가 유행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철학자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라고 일갈한 철학자다.시대와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의 눈으로 1841년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간행하여 한 시대의 사상을 관통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의 종합체로 보았다. 인간은 무한한 유한함이며, 유한하면서도 유한하지 않기 때
AD 270년 이집트의 한 시골 마을의 예배당에 스무 살 나이의 안토니우스란 이름의 청년이 들어왔다. 때마침 강단에선 마태복음의 한 말씀을 읽고 있었다.“…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한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그런데 이 주의 말씀을 듣고
우리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병을 진단하고, 그 진단에 따라 바른 처방을 하고, 그 처방을 따라 치료하면 병들기 전보다 더 건강한 교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을 믿는다.하나님의 교회에는 어떤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이란 언약의 치료약이 있다. 이 약을 제대로 쓰면 못 고칠 병이 없기에 이 병을 고칠 각오가 없이 손을 놓고 탄식만 하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교회가 지금 앓고 있는 병을 요약하면 무속화(巫俗化) 물량화(物量化) 세속화(世俗化) 우민화(愚民化) 귀족화(貴族化)를 꼽는다. 그 첫째는 단연 무속화(巫俗化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벌어들인 돈을 세고 있을 때, 다른 어떤 사람들은 빚 문서를 손에 쥐고 괴로워한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의 길로 가고 어떤 사람은 실패의 길로 가게 되는가.실패한 사람들 중에는 실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탓인 아닌 주위 환경이나 이웃 탓으로 어쩔 수 없이 실패한 경우도 있을 것이나 일반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이 실패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미국에서 발간되는 월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