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서는 과거의 일에 중점을 두기 보다 앞으로 될 일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의 뜻을 바르게 보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조심하여야 한다.선지서에서 사명 자가 전하려는 목적을 보면 사 66:15에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초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말씀하는 것이기에 재림 때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한다는 것은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에 구약에 이미 재림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기
오늘날 신학에서 사명 자의 길을 복음 증거와 구제를 큰 틀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구제는 다양한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에 구제는 특정한 사명을 가진 자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복음 증거이다.따라서 기독교의 가장 큰 관심사가 신학을 통해 복음 증거를 위한 지도자(목회자)를 양육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기독교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이 대중에 공급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해석의 방법에 따라 신학자의 주장이 나누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예수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쉬시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인데 사 62:1에서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이라며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냐면 11절에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며 상급과 보응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까지 가야 구원이 완성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초림의 구원으
죄를 사한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면 계 5:9의 하반부에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계시록 1장에 피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 사함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피로 살 때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의 죄를 예수께 팔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사가시는 것이 아니라 요일 1:9를 보면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일곱째, ‘성도의 교통하는 것과’에서 성도의 교통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단이나 잘못된 자들과 교통하는 것은 안 되지만 진리 안에서는 서로 교통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지체이기 때문에 머리와 지체가 서로 교통이 잘 이루어져야 건강체가 된다. 어디가 막히게 되면 각종 병이 오게 된다. 따라서 육체의 모든 혈관이 교통, 즉 소통이 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 간에 교통이 잘되어야 하지만 잘못된 사람과의 교통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이 7-11을 보면 미혹
다섯째,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씀에서 성경에는 성령을 믿으라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성령을 믿는다고 하냐는 것이고, 또한 성령은 충만하게 받으라고 한 것임에도 어떻게 ‘믿사오며’라고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행 1:4에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데, 여기서 약속하신 것이 성령으로 성령이 오실 줄로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믿사오며’가 맞는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재림의 예수께서 오실 줄로 믿고 기
셋째,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하는 것에서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오고 다음에는 아들이 나왔다면 세 번째로는 성령이 나와야 하는데 마리아가 나왔기에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며 성령이 먼저 나온다. 여기서 천주교는 마리아를 굉장히 신성화하고 우상화해서 섬긴다고 해서 성령 자리에 마리아가 올라갔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섬긴다고 해서 우리가 마리아를 부인할 수가 없고, 또한 동정녀라는 것으로 정절이 있는 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는 눅 1:27-
둘째,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것에서 ‘외아들’이 아니고 ‘독생자’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를 가리켜 ‘내 아들’ 또는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히 1:2를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라며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아들이냐면 6절에 ‘맏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맏아들이라고 한 이유는 히 2:10-11에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사도신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이 있다. 또한 보통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혹은 아니냐를 따지고 있으나 어느 정통 교단에서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이 천주교 계통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교에서는 사도신경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나 롬 10:10에 보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사도신경에 관한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첫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때는 하나님은 강한 분으로 오신다는 것으로 재림은 강한 분으로 오신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볼 때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면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서로 섞이게 되면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재림은 강한 자로 오시는데 그 이유는 상급과 보응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급을 받는 자가 되어야지 보응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기를 쉬지않고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인데, 사 62:1절에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초림은 기름이 떨어져 꺼져가는 등불을 들고 있는 미련한 처녀도 구원하지만 재림은 꺼져가는 등불을 들고 있는 처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 42:14절에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며 오래 동안 고요히 참았다는 것은 은혜시대에는 고요하고 잠잠하게 참았다는 것이지만 이제는 일어나서 쳐 죽이겠다는 것이다.이럴 때 주의 종들이 소리를 외쳐야 한다는 것이지만 소경이고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것으로 사 42:19절에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합 2: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며 이 묵시를 명백하게 새겨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는데 그것이 종말이라는 것이고, 종말은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한다는 것이다(합 2:3). 즉 재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세상 끝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문제는 종말 때는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그 속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다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합 2:4). 여
예수께서는 소경이고 귀머거리가 된 지도자를 향하여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라며(마 23:13)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된 지도자는 천국 문을 닫는 자라는 것이고, 오히려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이기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고전 15:3-4절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며 성경대로 죽고
계 6:17절을 보면 ‘진노의 큰 날 앞에 누가 능히 설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큰 날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면 계 14: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며 진노할 때 십사만 사천이 어린양과 함께 서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데 사 13:5절을 보면 ‘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가에서 왔음이여 곧 여호와와 그 진노의 병기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이 헷갈린다고 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인지,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 것인지가 헷갈린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잘 모르기 때문으로 예수를 믿으면 받는 구원은 이미 우리가 받은 구원이고, 끝까지 견뎌야 받는 구원은 재림의 예수께서 오실 때 받는 구원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실 때에 받는 구원은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서 받는 구원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 인내심을 가
신앙생활은 성장해서 완전한 곳까지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고전 13:9-11절을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며 바울이 어릴 때가 율법에 있을 때로 율법에 있을 때는 율법이 최고이고 율법으로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을 했었으나 장성한 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
우리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된다는 것은 마귀가 다른 씨를 심었기 때문인데 마귀가 다른 씨를 심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가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잘못된 교훈을 배우면 모두 가라지가 된다는 것이다. 좋은 씨를 심어서 좋은 씨가 됐어도 알곡이 채워지지 않으면 쭉정이가 되고, 잘못된 교훈을 받아서 잘못되게 깨닫게 되면 가라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쭉정이나 가라지나 모두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아무 곳에가 가서 아무 교훈을 받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가라지가 되고 쭉정이가 되
사 41:8-9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라며 땅 끝, 땅 모퉁이에서 부른다는 것으로 세상에서 볼 때에는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모략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러서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해를 입은 여자가 해산의 고통으로 철장의 권세를 가진 애를 낳는다고 하였는데 철장을 든 아이를 낳으면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린다는 것인데 이처럼 박살내는 일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지냐면 미 5:1절에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라며 이스라엘 재판장의 뺨을 친다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재판장이 누구냐면 2절에 있는 사람으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며 베들
시 105:17-18절을 보면 ‘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에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라며 종으로 팔려간 것도 억울한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떻게 꿈을 이룰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 19절에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며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먹으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다고 한 것이 우리를 단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먹고 단련을 해야 20절이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