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명절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가로 막아버렸다. 발전된 변종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출현하는 것을 보면, 바이러스는 사람의 머리보다 영리한 것은 분명하다. 이제 국내 감염자도 3천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코로나19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잠잠해져야 자영업자들도 곤궁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국민 모두는 걱정하며, 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요셉은 형들이 엎드려 자신에게 절하는 순간 어렸을 적 꿈이 성취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형들이 이 사실을 알 까닭이 없고 양식을 얻기 위해 낮은 자세를 취한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떠올리며 짓궂게도 형들을 정탐꾼(~yliG>r;m.)이라고 몰아붙인다. 창세기 42장에 ‘정탐꾼’이 일곱 차례 언급된다(9, 11, 14, 16, 18, 30, 31, 34절). 이야기의 흐름을 관찰하고 있는 독자들은 당연히 요셉이 어릴 적에 형들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며 복수한다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나온 형들이 생각하기에
“가츠라 태프트 조약”을 일본과 체결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렌은 1905년에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제동을 걸고자 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이권쟁탈전에서 그의 견해는 무시를 당했다. 공사의 직책에서 물러난 후, 알렌은 미국에 귀국해서도 의사로서 활동하다가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주, 톨리도에서 사망하였다. 21년간 한반도에 머무는 동안에, 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내 프란세스 앤과의 사이에 2남, 호레이스 에단과 마우리스를 두었다 (Horace Ethan and Ma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 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안에 거짓 일꾼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거짓 일꾼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도 크게 보아 두 가지 거짓 열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 또는 일꾼이요, 하나는 거짓 고백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은 이리(마7:15)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진실한 선지자들만큼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도 역시 진정한 일꾼보다 거짓 일
사이비 교주 ‘최 OO’의 하수인 노릇 하며 배를 채웠던 목사들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으므로 지금까지도 참회하는 목사들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아니 도리어 그들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교권을 마구 휘두르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실명을 공개하면 어떨까? 1980년대 중반기부터 선풍적으로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던 ‘퍼시콜레’란 자도 있었다. 그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를 아주 경쟁적으로 강단에 새우기를 원했고 그의 책을 교회 적으로 보급하기도 하였다.이후에 언론들은 그에 대하여 교회, 교단, 기타 등등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어느 날 친구와 만나서 일을 보고, 가까운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멀리가서 식사하기도 그렇고, 비싼 값을 내고 밥 한끼를 먹기도 그렇고 해서 가까운 구내식당을 찾았다. 구내식당에서 식사하려면 식판을 들고 긴 줄을 서야만 한다. 차례차례 밥과 국과 반찬들을 떠서 식판에 담은 다음 자리를 찾아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식당 입구에 놓은 메뉴판에 내가 좋아하는 ‘성게 미역국’이 적혀 있어서 입에 군침이 돌았다. 회사 직원들이 대부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와 나는 식판을 들고 긴
본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초로 세워진 구원의 방주다. 구약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심판 내용 중에 인류와 삼라만상의 생명을 멸하실 때 창조의 근원인 생명과 종족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의 생명 유전을 위한 홍수 기간 내내 견딜 만한 방주를 짓게 했다. 문제는 방주는 하나만 짓게 하셨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하나만 만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방주가 하나인 것에 대한 의미를 신약의 교회에 대한 개념과 병치하여 생각해야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신약에서
본문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불의한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원통함을 호소하는 내용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신 내용이다. 요즘같이 코로나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암울한 상황, 많은 이가 우울증에 걸리는 시대에 낙심치 말라는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이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끈질기게 탄원한 결과 소원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주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면 들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한국교회는 비대면예배라는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교회마다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있었다. 특히 작은교회가 유난히 많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총회에 속한 교회들의 어려움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제55회 성총회를 개회, 총회발전방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으로 믿는다”대한예수교장로회 제55회 합동중앙총회 새총회장에 선출된 조옥선 목사(경인노회 초석교회)는 코로나19로 어려움
본문에 육십 만 군중이 나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 주야를 하나님과 대면하며 율법을 받는데 백성들은 산 밑에 있고, 기다려도 지도자가 내려오지 않으니 결국은 자기들을 지켜 줄 신을 만들어야겠다고 한다. 지도자인 모세가 곁에 없으니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들이 아론을 찾아와 난리를 치고 결국 아론은 분별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덩어리로 황금 송아지를 만드는데 수긍해 버린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 같았으나 기복적인 신앙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뭔가 역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 같으니 곧바로 다른 것을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음 전도자’이자 한국교회 부흥과 세계교회 성장을 주도한 한국교회의 큰 어른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향년 86세)가 14일 오전 7시 13분 서울대병원에서 소천했다. 조용기 목사는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올 2월 부인인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희준, 민제, 승제 세 아들만 남았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이며, 오후부터 조문을 할 수 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빈소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고인의
지금 지구촌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이상기후 현상으로 염려, 불안, 걱정, 초조 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의 차이도 있지만 똑같이 교회에 다녀도 신앙이 있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도 있다. 하나님을 얼마만큼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냐에 따라 염려하는 생각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해서다. 예수 믿어도 때론 망할 수 있고, 병들거나 어려움을 만나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지 아니할 때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유래를 찾기 어려운 정체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위험한 감염병을 정부나 교회도 어떻게 속 시원하게 해결할 대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마냥 방역! 또 방역만 외치며 각자도생할 수 있기 위해선 거리두기, 손 소독, 마스크 착용 등등 지침에만 매달리는 중이다. 너무 오랫동안 강조하다 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이 둔해져 설마 나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지배하여 방역 지침에 둔감한 실정이기도 하다.그러다 보니 교회도 재적인원에 비례하여 겨우 최대 20% 정도 만 비대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타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 정치구조, 경제구조를 타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공동체운동도 굴절될 수밖에 없었고,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는 계속되어 왔다. 성서 베드후서 2장13절 이하와 유다서12절은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공동체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진정한 화해와 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신대학교 전 교수 박재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공동식사와 해방의
‘용서하다’의 히브리어 ‘나싸’(נשׂא)는 ‘들다, 짊어지다, 옮기다, 제거하다’ 등을 뜻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길게 소개하는 출애굽기 34장에도 ‘용서’가 자비의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출 34:7).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자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두 차례 ‘아나 싸 나’ 용서를 구한다(창 50:17). 머리는 숙이고 허리를 낮춘 채 두 손을 바닥에 대는 자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태도다. 구약의 용서 ‘대신 짊어지다’는 ‘친구란 대신 짐을 져주는 사람, 용서하면 친구가 된다’는 인디언
그런데 당시 조선인들은 콜레라가 쥐 귀신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해서, 도성 곳곳에 고양이 그림이나 새끼줄을 붙이거나 고양이 시체를 부적으로 설치했었다. 백성들의 무지함과 두려움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정황을 만들었다. 미신에 속아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던 시기에 알렌과 헤론, 에비슨 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결국 이러한 의료 선교사역의 효과를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서양 선교사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들어와서 복을 전하게 될 때에는 서울 장안에서는
사람이 생애에서 가장 솔직할 때는 단 두 번, 즉 태어났을 때와 죽을 때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식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자신만의 움막을 지어 숨어 살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죽기 전에 원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는 순간에 하는 마지막 유언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최고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죽기 직전의 말인 것입니다. 불교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성철 스님은 참 대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 식사가 한 수저 삶은 콩 몇 알
9월 2일 주일 예배를 드리며, 어재의 날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 朝鮮人 虐殺事件, 간단히 간토 대학살)은 간토 대지진(1923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대대적인 학살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1] 혹은 6,600명[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만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조선인은 그들에게 무엇이었단 말인가?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운
땅속에 묻힌 상태로 완전히 썩고 나서야 아름답게 승화되는 잘츠부르크의 암염……. 소금이 되려면 천둥과 번개, 거친 폭풍우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랜 인내를 거쳐 아름다운 결정체로 태어나는 잘츠부르크의 암염은 사랑의 과외선생이다. 어느 분이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 위층에 떡을 드리려 올라갔다. 윗집에는 90대 노부부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발이 성성한 90대 할아버지가 나왔다.“할머니 계세요?”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안쪽을 향해 다정하게
복음이 지구촌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지만, 오직 진리로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있을까? 세상풍토와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야 하는데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신앙인이 많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이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항상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원망했던 모습을 우리는 말세에 거울삼아 경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나와 수르광야에 들어가서 사흘길을 건넜지만 물을 얻지 못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만났지만 써서 식수로 사용할 수 없자 모세를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