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사람의 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경 전도서 8장 1절에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링컨(A. Lincoln, 1809~1865)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내각구성을 위해 각료를 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서관에게서 한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런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성경이 말하는 경제정의는 한마디로 ‘나눔’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 ‘나눔’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난치지 않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불우한 이웃과 함께 나누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순절이 시작됐다. 그리스도인들은 절제된 생활, 겸손한 생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들어간다. 일부는 금식한 금식미를 아껴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사용한다. 하지만 금식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여주는 금식을 한다는데 안타깝다. 일부 목사는 목회를
사순절이 시작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 인간의 삶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사순절을 보내면서, 부활의 아침, 새로운 삶을 열어야 한다. 오늘 세계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평화, 샬롬을 담보 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서 유럽의 국가들이 하나가 되어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한마디로 경이롭다. 세계 모든 민족이 여기에 감동을 받는다. 분명한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평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조국은 정치인과 기득권자들의 악행
성경전서 잠언 16장26절에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인 뉴튼은 "굳은 인내와 을 하지 않는 천재는 이 세상에서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인간의 삶은 한마디로 고단하다. 이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해 모두가 안간 힘을 쓴다. 세상에는 굳은 인내와 노력 없이 천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한 사람도 없다. 인내와 노력을 한 사람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세운 목표가 멀기만 하다. 가다가 포기하기 때
3월 9일 실시하는 대통령선거가 50일도 남지 않았다. 국민들은 각 당의 후보 주변 지식인들의 입에 주목한다. 냉철하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로 저주에 가깝다. 이들에게서 화목하고, 관대한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후보들의 가족에 대한 인격살인을 비롯한 매일 지식인들에 의해서 터져 나오는 후보가족에 대한 비리는, 한마디로 후보가족이 ‘범죄집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썩은 부분을 소금에 저리라고 했다. 인간사회에서 자신을 연단하는데 불과 소금은 절대적
2022년 새해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진리의 빛이 세상 곳곳에 비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오늘 세계는 곳곳에서 나라와 나라, 같은 민족끼리, 한반도 역시 남과 북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진리의 빛으로 인해 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거두지고, 예수님의 평화가 정착되기를 대망한다. 모든 사람은 신년 새해에는 성공하기를 바란다. 흔히 성공해야 행복다고 말한다. 성공은 목표를 세우고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쟁사회에서 1등한 사람을 두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성공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다. 이 때 미가 선지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온다는 희망의 말을 전한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신 메시야가 온다고 선언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바이러스는 사람의 머리보다 영리하다. 신종바이러스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는다. 신종바이러스감염자가 연일 4000명 넘게 나온다. 델타변이 바이러스 보다 전파력이 빠른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또 다시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바이러스의 두려움을 모른다. 모두가 조심해야 바이러스가 잠잠해질 텐데, 야곱의 자손들처럼 욕망에 가득차 미쳐 널 띤다.코로나19 펜데믹이 잠잠해져야 자영업자들의 생활이 낳아질 텐데 걱정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 위해 1천 번제를 드
모든 죄악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온다. 성서에서 욕망은 우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에 이끌리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삶의 의미,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이다. 인간은 환경에서 무엇인가의 욕망을 습득한다. 그러나 욕망의 농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농도는 다르다. 한국사람의 욕망과 탐욕은 그 어느 나라의 사람보다도 농도가 짙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름이 나빠 성공의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민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하는 ‘위드 코로나’시대에 봉착했다. 이 때 국민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 생활전체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가 마치 인간에게 해방이라도 준 것처럼, 젊은이들은 거리로 뒤쳐 나온다. 이 때 인간은 온전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마태복음 5장 43-48절의 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9:17) 아멘.사람은 생각하는 동물, 행동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항상 사고를 가지고 산다. 그리고 생각한다. 생각은 항상 미래를 위한 것이다. 미래를 향한 꿈이며, 도전이다. 이래를 향한 꿈을 잃어버린 사랑은 산자가 아니다. 죽은 자이다. 우리가 오늘 미래를 향한 사고를 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면, 이 땅은 죽은 자들만 득실거리는 죽은 자의 땅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산자들만의 것이다. 사고는 항상 긍정적이어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는 생명
오늘 사회는 욕심을 가진 자에 의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결국 욕심은 탐욕이 되어 인간사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야고보서 1장14~15절)고 교훈하고 있다. 성경의 교훈대로 인간의 욕심은 많은 죄를 낳는다. 너를 죽여 욕심을 채우는 세상이 됐다. 욕심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없다. 명절 때 형제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형제를 죽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욕심 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은 누구나 내면을 보지 않고, 외모만 보고 판단한다. 미국 기업가이며, TV성격 작가인 월리스 아모스(Wally Amos, 1936~, 85세)는 "인생(人生)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이 아름다워야 외모도 아름답다. 내면이 아름답지 못하면, 삶은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만다. 엄킨 실타래와 같다. 중국 송나라(960~1279)때 당대의 유명한, 역술가가 있었다. 이 역술가는 한 눈에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집 대문에 사람이 들어서는
독일의 라이저 교수는 소명에 답하기 위해 학교를 선택했다. 그는 경제와 실용논리를 앞세운 직장보다 학교를 선택했다. 대부분 사람은 경제와 실용논리를 선택한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세상권력을 잡으면, 한자리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의 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예언자 에스겔은 유다를 둘러싸고 강대국들이 세력다툼을 벌일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예언자였다.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인들에게까지 희망을 주었다.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고 설파했다. 이방인들은 포로가 된 에스겔을 조롱하고, 희롱했다. 천사가 에스겔을 데리고 간 곳은 지성소가 있는 곳이었다. 구약 에스겔 47장 1-12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인간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물질의 증식을 멈추지 않았다. 제의적 성격의 물질은 기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생계걱정을 하다가 3모자가 죽어도, 탈북민 모자가 죽어도 아무 감동이 없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초대교회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은 유대교 과부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과부들의 고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은 물질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의적 물질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