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의 여름이 여름을한 번 울기 위하여매미 유충은 땅속에서 17년간의 세월은 보낸다고 했다 깜깜한 지옥 어둠과 고독을 이겨내며 한 철을 위한 준비가 기도처럼 오래오래 이루어졌으리 지금 한여름 불볕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 매미는 17년 동안 숙성시킨 침묵의 향기를 저 쨍쨍한 울음소리로 토해내고 있다 여름 지나면 목숨도 그칠 짧은 생의 핏빛 절창이 8월 염천을 건너고 있다‘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안도현 「사랑」)는 시구가 떠오른다. 한낮 불볕 아래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
맨 정신으로거두절미하고다짜고짜로하나만 청합니다“제 입에는 그저 아멘만 담으소서”유안진 시인: 1965년 『현대문학』 등단.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고문 시집 『달하』 『둥근 세모꼴』 등 17권 상재. 한국시협상. 정지용문학상. 소월문학상특별상. 목월문학상. 월탄문학상. 한국펜문학상. 구상문학상. 공초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등. 이 작품은 유안진 시인의 근작 시집 『터무니』 끝 차례에 실려 있다.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이라면 시집 종결의미를 담았다고 하겠다. 물론 시집은 학술논문과 다른 면이
숲을 접시에 담다숲정이 발치 아래그림 같은 호수 멋져우죽*에 앉은 철새빗겨든 물그림자때마침 황새 날아와물속 온통 새떼다곤두박인 숲정이머리로 딛고 서서바람 약간 불어도 흰 몸매 파들거려철새들 그냥 그대로물 속 숲에 앉았다준비해 온 접시에 호수 물 담았더니거기에 숲이 잠겨집에 갖고 간다며양손에 힘을 실어하산 길 에 나서다.* 우죽: 나무나 대의 우두머리에 있는 가지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문학예술』 서울 경기지부 부회장. 경희문화상(예술부문). 시조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작가상(시부문). 시집 『마중물 붓는 마음』 ,
우체국짧고 가는 문장이 두 줄로 포개져 있었다읽을 수 있을까, 이 비틀거리는새의 말을 쓸쓸한 발톱이 휘갈겨 쓴마음의 잔해들을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갔다가다 멈추고 공원 근처가까운 편의점에서 생수와 빵을 샀다벚나무 아래 나무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녹을 수 없는 눈과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나는 엽서를 꺼내 그 두
너의 숲 속에서너의 숲 속에서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음은네 눈빛에 물들고어깨에 기대숨쉰다는 것칡넝쿨보다 질긴 인연의 끈자라는 곳마다 그늘 깊은 숲너의 숲에서 나는물푸레나무가 되고 가문비나무가 되고그늘의 그늘이 되고숲의 숲이 되고너의 숲 속에서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음은너 또한* 조은설 시인: 본명 조임생. 『미네르바』 등단. 한국기독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한국본
비단 한 필당신한테 오고간 길 감으면 비단 한 필은 족히 나올 터. 이젠 슬며시 손을 놓으셔도... 내 머리 위 오리나무 하늘에 마구 길을 내는 새를 따라가셔도... 가시는 숲 어디인지 주소 주지 않으셔도...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놀 바라보는 하늘은 하나.이 비단 한 필이면 어느 마을 살아도 마음거지는 면할 터. 비단 올올이 풀리는 추억만 감아도이
생활과 예보비 온다니 꽃 지겠다진종일 마루에 앉아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오늘 처음 한 말이었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T. S. 엘리엇)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시인이 바라보는 시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냥 줍는 것이다/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버려진 채 빛나는/마음의 보석들//
한 알의 사과 속에는한 알의 사과 속에는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 땀과 사랑이 영생한다* 구상 (본명 구상준 )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2004년 금관문화훈장
꽃구름 카페벚나무 허공에다 꽃구름 카페를 열었습니다밤에는 별빛이 내려와 시를 쓰고낮에는 햇빛이 시를 읽는 허공카페입니다곤줄박이며 콩새 방울새 박새 오목눈이까지숲속 식솔들이 시를 읽고 가는가 하면벌과 나비 바람둥이 바람까지시를 어루만지고 가는 꽃구름 카페입니다공원을 한 바퀴 돌고나서 나도꽃구름카페 아래 쉬어갑니다벚꽃 닮은 매화, 매화 닮은 벚꽃어느 것이 진품
예전에 땅에 묻힌 할아버지보다더 이전에 땅에 묻힌 조상님네보다더 깊은 땅속에 내가 있음은살아가기 위해서지죽기 위한 연습이 아니다 달아날 곳도 없는 비좁은 지하 막장죽음의 신은 저 어둠 뒤에 숨어언제라도 불쑥 튀어나와 내 목을 조를 기회를 엿보지만 내게도날이 선 도끼, 날카로운 곡괭이수많은 산을 잘라먹은톱 한 자루 있으니 두렵지 않아 언젠가 한 번은 죽을 목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2월에서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해외로 나간 친구의체온이 느껴진다참으로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골목길에는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동 서 남 북으로틔어있는 골목마다수국색 공기가 술렁거리고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나도 모르게 약간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목련사회복지사가 다녀가고 겨우내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자 방 안 가득 고여 있던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무연고 노인에게는 상주도 문상객도 없었다 울타리 밖 소복한 여인 같은 목련이 조등을 내걸고 한 나흘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현대시학』 2021년 1-2월호에서이재무 시인: 1983년 작품활동 시작.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 외 11권. 소월시문학상
하나님아내를 사랑할 때는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아내를 잃으니 하늘에 닿는 슬픔에 당신을 부릅니다. 사람은 무언가에 몰두해 있거나 어떤 대상에 빠져 있을 때는 자신의 내면이 가득 차올라서 그것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탐닉의 대상 혹은 사랑과 연민의 대상을 잃었을 때, 비탄에 빠지거나 절망감으로 인해 중심을 잃게 되곤 한다. 한동안 그런 감정
코로나의 사전·1나는 슬픈 칼이다갈라놓고 띄어놓고 인정사정 싹독 싹독 자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자를 수 있는 칼날이 없다-시집 『달빛 해일』에서 * 이소희 시인: 동국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힌국기독시인협회 이사. 시집 『목련이 피는 이유』 등 다수조선시문학상. 기독시문학상. 풍시조문학상 이 시는 풍시조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이다. 풍시조는 물신시대(物
아버지의 주름살 마른 귀얄 스친 자리잡초 밭 갈아엎는쟁깃밥이 말린 두둑헛기침 너털웃음이 쓸고 가는 -시집 『솔잎 사이 은하 마당』에서* 천강래 시인 : 해남출생. 고려대(교육학 석사) 『시조시학』 등단시집 『이팝꽃 하얀 바람』 시조의 운율과 표현의 중요성을 동시에 잘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현대시조는 시 장르의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그때 울었다뽑히지 않으려는 듯 뿌리는 완강하다흙 속에 든 뿌리를뿌리째 뽑다니!사람 속 어디까지 파고든 내가뿌리째 뽑히는 것 같아나를 잡듯 뿌리를 잡아본다어느새흙 속을 파고 내가뿌리처럼 들어가 있었다그때 나는파를 뿌리째 뽑는 손을 보았다뽑히는 것이 뿌리만이 아니었다파를 뽑는 손이사람까지 뽑아낸다는 것을파는 파파파파열음을 내며 신음한다는 것을그러나 아무도그 소
저녁별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저녁별을 보며 갑니다.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낟알 같은저녁별.저녁별을 바라보며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풀벌레들을 위해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들판엔 어둠이어머니의 밥상보처럼 덮이고내 손가락의 거친 핏줄도불빛처럼 따스해 옵니
낙엽의 이미지떨어지는 무게는 잴 수 없다가을의 저울로 재기 전엔중량은 미지수다눈금에 새겨지는 순금의 순도그런 무게와 빛깔쯤으로낙엽은 진다더러 중량 미달의 낙옆 하나그러나 그 속엔 가을이 들어있다- 『조선문학』 20년11월호(355호) 박진환 특집에서 * 박진환 시인: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금년 등단 60주년.) 한서대 교수. 예술대학원 원장 역임.
나무 서시나무가 말한다나는 없다고 그래서 나무라고남을 나무라지 아니하고나무 자신도 안 나무란다비오나 눈오나 바람 불어도 나무의 존재는 철학적이다-시집 『77힐링시선집』에서* 박재천 시인: 시집 『존재의 샘』. 『조재의 빛』. 『존재의 마음』 등 9권 수상 목양문학 대상 한국창조문학 대상 총신 문학상 등 다수 언어유희를 통한 존재 탐구의 담론이다. 첫 연 나
가을 은유달빛이나 담아 둘까 새로 바른 한지창에누구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행렬인가기러기 머언 그림자 무단으로 날아들고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펴든 책장 사이로 마른 열매 떨어지는조용한 세상의 한때, 이 가을의 은유여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보면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하늘이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