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편지와 보고를 받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의사 존 헤론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부에서는 그 때까지 다른 지원자가 없었기에 그를 “장로교파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1884년 일본에 도착하여 준비하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 땅에 들어 왔다.1884년 6월 6일, 조선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요셉 하스(Joseph
1877년 알렌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 에 입학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1881년 6월 졸업할 때에, 알렌의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들 중에는 선교사와 목회자로 지원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해 9월에 콜럼버스에 있는 스탈링 의과대학(Starling Medical School)에 입학하였고, 1883
6. 알렌, 한국 땅에 들어오다1884년 9월 20일, 제물포 항에 알렌 선교사 (Horace N. Allen, 1858-1932)가 도착하였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날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훗날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후배 선교사들은 1884년을 한국 개신교 선교의 최초 기준점으로 삼았다. 알렌은 정식 선교사로서는 허락을
미국 북장로회가 중국과 일본과 인도 선교를 시작한 이후에, 한국에 대해서 선교의 가능성을 논의한 것은 1883년에 이르러서다. 일본 주재 선교사들이 본부에 보낸 편지 가운데 선교사 파송의 가능성들을 최초로 상의하고 있었음이 들어있다. 특히, 한국인으로 조정의 신임을 받아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이수정 (李樹廷, 1842-1886)에 관련된 소식이 녹스 선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 드러리 박사는 「장로교인의 파노라마」라고 하는 특별한 선교역사 보고서를 출판하였다. 미국 연합장로교회가 1802년에 선교부를 결성한 후로 1952년까지, 무려 150년 동안에 걸친 미국 장로교단의 선교역사를 주요한 교단의 사건들과 신학적인 논쟁들을 겸하면서 상세하게 기술한 책이다. 1802년에 장로교회 총회에서 각별하게도
5.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선교사 파송 결정한반도에서 열강의 각축 속에서 개화와 조정의 혁신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정변을 모의하고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정점으로 중국과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에도 복음을 들여보낼 준비를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대외 선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대해서,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
셋째, 구한말 조선의 정신적인 갈등, 사상적 방황과 지도층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 실학파의 구국운동이 실패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할 정신적인 중추세력이 표류하던 비극적 현상이다. 구한말 왕정 통치의 한계와 봉건제도의 패착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는데도, 개혁적 실학운동은 정치적인 격변에 휘말리면서 사색당쟁에 빠져 있었다. 충
4. 1884년, 갑신정변 토마스 선교사 이후로 16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던 한반도 땅에 마침내 빛이 비췄다. 안타깝게도,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변란이 빚어낸 혼돈 속에 있을 때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초부터 개화파의 중심에 있던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20대의 젊은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던 끝에
1863년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토마스 목사는 영국 성경공회 소속으로 윌리엄슨 목사의 집에서 한국 사람 두 명을 만났는데, 이들은 산동반도 지푸의 천주교인들이었다. 여기서 토마스 목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한국에 가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나눠주고자 하던 그는 1865년 9월에 백령도와 서해 항구도시들을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역이 시작되기까지 수많은 준비작업이 조선왕국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각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기관들이 움직였다. 이처럼 한국선교를 위해서 복합적인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을 확인하게 될 때에, 우리가 맡은 작은 일들이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혼란기에, 하나
이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으로 살면서 이웃을 사랑하여 조선에 찾아왔고, 한 생을 바쳐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희생의 삶을 토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한반도에 첫 주재 선교사로 알렌이 들
성경에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기쁜 소식”이되, 특히 가난하고 외롭고 깨어진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전파된다 (롬 1:17, 10:17). 기독교 복음의 전래와 함께 한국의 근대화가 촉진되었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던 시기에, 갑신정변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던 1884년 무렵, 구한말 조선 땅을 차지하려
1890년에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너무나 사역의 열매가 없어서 큰 시련에 봉착했었다. 수 년동안 노력해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너무나 낙심한 나머지 선교부의 철수를 건의할 정도였다. 젊은 선교사들은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았고, 큰 성과를 거두고 있던 선배 지도자를 초청했다. 의욕에 넘치면서도 실제적인 방법을 개발하
알렌은 25주년 선교대회에서 직접 출석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후임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에게 자세하게 “기록된 역사적 설명”을 보냈다. “인사말”에서 알렌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던 구한말 조선 땅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진행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비록 의료 선교사로 시작했지만, 분명히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서 한국주재 미국 공사관의 담당의사직을
따라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한 시점으로부터 한국기독교 역사를 계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서술들은 전혀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고,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최초 한국인이 쓴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 역사는 백락준의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확장하여 한국어로 펴낸 것인데, 이 책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부터
1장 한국교회의 뿌리(1):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한반도에 기독교 신앙이 전해진 후로 정치와 사회, 경제와 교육, 의학과 사회사업 등 각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였다. 한국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지고, 더 큰 빛을 비춰주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차분히 기초를 다져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과연 어떤 분들이 가
머리말 견고한 신앙의 뿌리와 계보지금 전세계 사람들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처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전세계가 왕래와 접촉이 금지되었고, 경제와 산업은 초토화 되었다. 매일 감염된 환자들이 늘어나고, 전세계에서 사망자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근절 방안이나 대책도 없다. 증상을 가진 사람과 접촉을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성령을 통해서 실현되어지는데, 믿음을 통해서 받은 것이라는 점이 핵심내용이다. 스위스 개혁진영은 견고한 통일성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취리히와 제네바에서는 점차 교회의 독립권이 허용되어졌으나, 베른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모든 교회업무가 사실상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었으며 특히 교회가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권징을
1544년에 이르게 되면서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놓고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 새로운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해에 루터는 “성만찬에 대한 간단한 고백서”를 출간했는데, 취리히 교회의 신학을 거의 이단적이라고 거칠게 비판하였다. 루터의 글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취리히와 제네바로부터 나온 성만찬 해석은 크게 위축되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츠빙글리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에 가담한 다섯 개의 도시들인 농촌지방들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우리, 프리부르크)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