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열 살 차이 나는 95세의 할아버지가 아내의 옆에서 병간호를 자처하며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아버지, 제가 어머님 곁에 있을게요. 아버님은 들어가 쉬시고 내일 다시 오세요.”자식들이 만류해도 아버지는 “아니다. 이 사람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 하시면서 아내 곁을 한시도 떠나려
쉰 살이 접어든 영조는 어느 날 운동을 하면서 몸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대학생 아들한테 팔씨름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당황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보니 턱없이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팔목이 꺾이려고 하는 순간, 아들이 살짝 팔씨름을 져주는 것이 느껴졌다. 아들이 분명 이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을 생각하면 씁쓸하고, 아들이 생각하면 기특한 마음
불현듯,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생각난다.“비 올 때 쓰고 나온 우산을,/날이 개었다고 어딘가에 버려둔 것처럼,/세상살이가 쉽지 않았을 때/한껏 몸을 기울여 기대고 있던 친구를,/그사이 좀 살만하다고 해서 잊고 있었다”늘 이런 식이다. 일이 잘 풀려 내 자리가 편안할 때는 만나는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까마득히 잊고 산다. 오랜만에 전화 통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들이 폐하리라”(고전 13:10). 세상은 허상으로 가득하다. 근원이 아닌 것들이 근원 행세를 하고, 본질이 아닌 것들이 본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땅과 하늘을 흔드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물질세계는 흔들려 진동하지 않으면 굳어지는 성질이 있다. 강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어서 악취
예루살렘의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던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을 잃고, 세 과부만 남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나오미는 마침 고향 땅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막상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두 자부가 마음에 걸렸다. 나오미는 두 자부를 불러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나그네(strangers)’는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거주하는 사람 곧 뜨내기이다. ‘행인(pilgrims)’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으로 순례자이다. 모두가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사는 사람, 시민권이 없는 사람, 잠시 거주하기는 하지만
야곱은 마침내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창세기 설화자는 야곱의 승리를 승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 32:31). 무엇이 문제인가? 이때까지 야곱은 이기적이고, 간사하고, 냉혹했으며,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도덕했다. 사람들은 부도덕
솔로몬의 뒤를 이어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쪽 이스라엘 10부족 대표가 르호보암에게 나아가 솔로몬이 부과한 부역, 세금 등 무거운 짐을 덜어달라고 요구한다. 나라의 원로들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왕의 젊은 친구들은 왕이 유약하게 보이면 법질서가 무너진다며 강경한 정책을 쓰라고 주문한다. 르호보암은 젊은 친구들의 주문대
예수께서 성소의 회랑(아케이드)을 걸으신 일이 있다. 예루살렘성소 동쪽 솔로몬의 회랑은 높이 12m의 고린도식 원주가 여러 개 서 있고, 남쪽 왕의 회랑은 직경 2m에 높이 10m나 되는 4열의 흰 대리석 원주 162개가 서 있다. 헬라 사람들은 이렇게 높이 솟은 회랑의 원주를 무너지지 않는 절대 진리의 상징으로 삼고 그곳에서 제사도 지내고, 철학을 논하기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눅 17:5-6) 예수께서는 왜 ‘모래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했을까? 사람들은 으레 ‘겨자씨’ 하면 작다는 것을 먼저
교계 일부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격하게 반대하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도덕과 윤리의 가치들을 허물고 성적 타락을 방조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악을 서슴없이 범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더 나아가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명백히 죄임을 가르치고 정죄”하며 “죽음으로 응징한다.”고 섬뜩한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정의당이 발의한 [포괄적 차
이스라엘의 불구대천의 원수 에돔.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원수였던 것은 아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의 후손이 에돔이고,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이다. 의좋던 형제는 야곱의 장자권 탈취로 인해 험악해지고, 한솥밥을 먹을 수 없게 된 야곱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피신한다. 야곱은 그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의젓한 부족을 이루어 귀향길에 오른다. 하지만 에서의 분노
신명기 역사가는 남다른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이 참담하게 된 것은, 경제력이 부족해서도, 군사력이 모자라서도, 바빌론이 강해서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길이 먼 데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말씀이 네 입에
“정대협이 지난 30년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번에 걸친 폭로성 기자회견으로 정의기억연대(정대협)와 전 이사장 윤미향 씨에 대한 논란이 마치 폭풍의 언덕과 같다. 이 단체 이사장이었던 윤미향씨가 ‘할머니들’의 쉼터로 구입했다는 부동산을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고팔았다든지, 기부 받은 돈의 입출금 장부가 투명하지 않다든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길게 서술하면서 목격자로서가 아닌 “내가 (전해)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라고 증언자 입장에서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한다. 바울은 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일상이 정지된 삶. 코로나19가 가져온 충격 가운데 하나이다. 국경이 폐쇄되고, 학교 문이 닫히고, 직장 출근이 금지되고, 쇼핑몰이 닫히고, 관광지와 극장 출입이 금지되고, 그리하여 서로를 대면하지 못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행히 한국은 방역당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도시봉쇄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세계의 많은 도시들
난세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동족을 구명했으나 거친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비극을 초래한 고사가 있다. 저 옛날 이스라엘을 힘센 장수들이 다스리던 시대 입다 이야기다. 입다는 므낫세 족 가운데 길르앗 사람이 창녀에게서 난 아들로 힘이 장사였다. 그러나 천한 계집에게서 태어났다하여 집에서 쫓겨난 입다는 폭력배들과 어울려 살았다. 마침 암몬 족이 이스라엘을 치기
아동문학가 문삼석의 동시 가운데 [그냥]이 있다. 어쩌면 사랑은 이렇게 ‘그냥’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이 있다. ‘그냥’ 그곳에 있던
14세기 유럽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흑사병(페스트). 유럽 인구의 약 1/3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수많은 농노들이 사망하자 경작을 못하게 된 영주들은 돈을 주고 일꾼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농노들은 임금노동자가 되면서 자기 소유의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사유재산의 축적은 자연히 자유인의 신분을 얻게 했다. 농노의 기반 위에서 유지되던 유럽의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감염병 바이러스의 모양이 왕관과 같다 하여 ‘코로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스, 메르스도 코로나였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는 감염경로, 잠복기, 치사율 등 실체를 알 수 없어 ‘신종 코로나’로 부르다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코로나19’로 명명했다. ‘코로나19’는 발병 두 달이 지났음에도 감염원이 어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