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말씀을 순종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믿음의 교제에 역사하는 힘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인간들에게 자기보다 먼저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이전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종교들이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외에 구원의 길은 없다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나 이상, 이적, 기도 중의 뜨거운 마음, 혹은 기도 중의 음성 등을 자신의 구원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모든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역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만이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 중에 병이 나섰음을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를 소유하고 살아가지만 그 놀라운 복음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일수록 사람의 위험을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귀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당연히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것입
사도 바울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친 것 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사도 바울과 같은 부르심을 입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의 많은 부분, 즉 그의 가치관이나 자세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모든 삶과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할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는 항상 악한 주동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외칠 때 백성들이 그것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쓴뿌리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쓴 뿌리가 나서 교회 성도들을 그 원래의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고 세상으로 가게끔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모아놓고 너희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으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어 자기 종이 자기의 후사가 되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자기 종을
믿음은 주님의 능력이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문과도 같습니다. 만일 그 문이 조금 열려 있으면 그의 능력이 그만큼 밖에는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모든 약속들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면 주님께서는 그가 원하셨던 대로 자유롭게 역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예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부여받은 직분을 수행하면서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감당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은 대부분 자녀들의 양육과 성장에서도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가치관이 바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첫째자리에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자녀 양육입니다. 성도들이 자녀를 양육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지성소와 성소 사이는 두꺼운 휘장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
우리가 성도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도들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니는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사원들을 평가하거나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 회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남의 하인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으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어 자기 종이 자기의 후사가 되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자기
신앙생활에서 실수하기 쉬운 삶 중 하나가 사람 앞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외식입니다. 외식은 마치 배우가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다가 점점 사람 중심으로 바뀔 때 그 사람의 신앙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을
우리나라도 이제 다민족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아졌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다민족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일반 사회에서도 여전히 인종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된 주님의 교회는 인종과
우리가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로 믿을 때 성령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를 세 가지로 말하면, 첫 번째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령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를 성령의 내주라 하고, 둘째는 성령의 인도라 하고, 셋째는 성령의 역사라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믿음 일 것입니다. 성경에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가 삶 가운데 자주 말하게 되는 단어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기독교 안에서만 사용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면서 믿음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자신의 배우자를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복음 전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고 우리가 수고하고 몸을 던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의 현장에는 반드시 복음 안에 있는 동역자들과의 협력하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보내실 때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이것은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와서 아주 신나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