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4년에 이르게 되면서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놓고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 새로운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해에 루터는 “성만찬에 대한 간단한 고백서”를 출간했는데, 취리히 교회의 신학을 거의 이단적이라고 거칠게 비판하였다. 루터의 글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취리히와 제네바로부터 나온 성만찬 해석은 크게 위축되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츠빙글리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에 가담한 다섯 개의 도시들인 농촌지방들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우리, 프리부르크)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1529
츠빙글리와 취리히 세속정부가 종교개혁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1520년 7월 15일부터 츠빙글리는 프란시스코파 설교자 프란츠 램버트와 성경해석과 설교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로 취리히 시의회는 오직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1521년 여
유아 세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종교개혁자가 츠빙글리이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근거하여, 할례와 유아세례의 연관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는 이미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할례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었다 (롬 4:11-2). 그는 재세례파 후프마이어와 캬스파르 쉬벤크펠트의 저술을 비판하면서, 성도들이 구세주에 대하여 확고한
스위스 지역 개혁자들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31년 10월 11일, 스위스 가톨릭 진영에 속한 군대가 두 번째 카펠전투에서 개신교 진영의 군대를 제압하였고, 츠빙글리는 사망했다. 그리고 11월 24일 외콜람파디우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츠빙글리의 핵심적인 교리들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지대
성경의 권위를 가장 신뢰하였다 하더라도, 많은 구절들에 대한 정확한 의미파악과 해석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과 개혁적인 신학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신학의 핵심쟁점이었던 성만찬 해석에서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가장 두드러진 가르침으로 남았다. 1525년 이후로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몇 차례 의견을 표시하였고,
에라스무스와 루터 등 인문주의 학자들과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준 많은 신학자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였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 성경번역을 시도한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가 신구약 완역본을 출간해냈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서 살았던 로렌조 발라는 정확한 성경본문 이해를 촉구하고, 교황을 적그리
3)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스위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근간으로 성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선도하였고, 외콜람파디우스, 파렐, 불링거, 칼빈, 삐에르 비레, 테오도르 베자가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성경적인 제도와 윤리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스위스 동맹이 강화되면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선포한 복음이 주
2) 성경의 명료성과 확실성1522년 9월 6일,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이라는 설교를 출판했다. 이 설교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과 능력이 핵심 내용으로 강조되어있다. 츠빙글리는 서론에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는 명백한 선언을 하였다. 이 설교의 첫 부분에서 츠빙글리는 외형적으로 기록된 말씀
1516년부터 글라루스 근처 아인지델른 교구에서 성경을 강해하면서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원어성경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신학과 철학을 새롭게 개발하였으며, 에라스무스와 같은 박식함과 성경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르나르드 삼손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츠빙글리는 1518년 취리히
1. 츠빙글리의 성경관 인문주의 신학문과 전통적 로마 가톨릭 신학을 받은 후, 츠빙글리 (1484-1531)는 루터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스위스에서 자신의 개혁신학을 제시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과 스위스 지역사회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고 참고했지만, 그는 루터를 자신의
서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2019년은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이 선포 된지 오백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미 1984년에 츠빙글리 탄생 오백주년에 즈음해서, 그동안 잊혀진 그의 사상과 남다른 기여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과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츠빙글리의 여러 저서들이 영어로 새롭게 번역되었다. 최근에 종교개혁 오백주년 대회가 활발하게 개최되었고, 역
가장 기억할만한 루터의 공헌은 사람의 헛된 공로주의와 선행을 부채질하는 로마가톨릭교 교회의 허상들을 타파한 점이다. 그가 선구자의 길을 제시하여 개신교회의 돌파구를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복음은 공로주의와 선행사상을 혁파하는 데에는 큰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오직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 전체 성경을 대표하는 교리로 세
“설교자는 강단의 소유권자가 아니요, 회중의 우두머리도 아니었다. 말씀을 통해교회를 지배하는 분은 그리스도였다. 적어도 원칙으로는 기독교 복음의 사역자들은 교체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순환 시스템이 다른 교구에 속한 교회들에서 사역하는 동료 사역자들과 함께 일할 때에 협력관계를 고무하고, 서로 설교를 청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교회의 세
4)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나 지난 날 자신들의 수고와 업적을 자랑하면서 특권층을 형성해서는 안된다. 지식주의,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총회, 노회, 당회에서 패권주의로 비쳐진다면 성도들과 세상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교단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조직으로 변질되어가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교연합 단체, 전국적인 교단의 총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2)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특정교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설교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용기있는 도전과 칼빈의 신학적 성찰이 남긴 5백년의 교훈을 되살려야할 중요한 책임은 현재 기독교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과 교회의 리더들에게 달려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정부의 무능력이나 정치권의 패권적 오만함, 경제계의 약육강식, 법조계의 부패 등으로 사회가 혼탁해졌다. 일반 시민들과 비판자들은 권력자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것이 일
2. 영혼을 살려내는 말씀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 성경에 입각해서 선포된 말씀도 역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와 같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철저하게 이를 확신했다.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가 작성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설교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선포된 말씀 자체에 대
1. 성경 말씀의 본질을 증거하는 교회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금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관행으로 시행하고 있는 바들을 정당화 하려고만 하지 말고, 예배와 행정과 재정집행 등을 완전히 바꿔야만 한다. 총체적으로 각성하고 갱신하여 완전히 새로운 교회상과 성도의 모습을 세워나가야만 한다. 한
필자는 그 후로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논의들에 대해서 점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을 이기고자 했던 선진들에게서 큰 도전을 받았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되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1988년, 킹던 박사의 발표 직후에 그 자리에서 일본의 저명한 칼빈학자 와타나베 교수가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라고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