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시절 한 번의 전도설교를 하고 돌에 맞아 순교한 전도자가 스데반 집사이다. 그는 사도행전 7장의 말씀대로 뜨거운 가슴으로 전도설교를 하고, 그 설교에 성난 청중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스데반은 비록 그렇게 돌에 맞아 죽지만 천사 같은 얼굴로 자신에게 돌 던지는 청중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기도드리며 숨을
평생 청빈과 경건을 붙들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에이든 토저(Aiden Wilson Tozer : 미. 1897-1963)목사는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성도가 그의 성스러움을 위해 지불해야하는 대가인 것 같다.”고 했다. 레바논의 사상가로 산문시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33~1931)은
"간신"은 언제나 세계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 노릇을 해 왔다. 충직하고 진실 된 위인이 그 자질과 고매한 인격에 합당한 역할을 맡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진실 된 사람을 무대 위로 올려 온당한 대접을 해 주기에는 인간들의 본성이 너무도 사악하다. 혹, 진실 되고 유능한 위인이 만인에게 각광을 받게 된다 해도 아마 그 사람 역시 타락한 세파에 찌들어
망한 나라의 백성도 슬프고 아프지만 왕족처럼 슬픈 존재가 또 있을까? 다니엘이 그런 존재였다. 다니엘은 유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소년 시절에 나라가 망해 왕족인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먼 이방 땅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다(BC 605).하지만 다니엘에게 무너진 것은 나라일 뿐, 꿋꿋한 여호와 신앙의지와 히브리 민족의 후예로서의 자긍심은 결코 무너지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2000년 교회역사에서 중단 없이 계속 된 경건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경건하게 살려는 갈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원 운동의 모양은 다양했지만 시대를 무론하고 수도자들에게 공통된 서원은 청빈(淸貧), 순결(純潔), 순명(順命)이다. 이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을 자랑하지 않고, 있는 것과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기를 애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이 바르고 옳다.금과 은을 귀히 보고 나무와 흙을 천히 보는 것은 세상적 가치기준이다. 나무와 질그릇으로 쓰이는 것이 싫어서 그것을 사양하고 피할 때, 하나님이 나무와 질그릇에 담고 싶어 하시는 것을 느끼고, 자신을 나무와 질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고, 사망의 원인이 되는 그 죄의 원인은 욕심(약 1:15)이라고 말씀한다.욕심에는 두 종류의 욕심이 있다. 버려야하는 욕심과 버려서는 안 되는 욕심이 그것이다. 버려야 하는 욕심은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이고, 버려서는 안 되는 욕심은 의와 하나님에 대한 욕심이다. 죄와 세상에 대한 욕심의 결국은 사망이다.(약 1:15
죄와 죄의 세력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구주께서 십자가의 은총으로 해방(解放)하여 자유를 주셨으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위장된 선(善)으로 포장된 악마의 속삭임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자유인이 아니다.잃어버린 것은 찾을 수 있고, 빼앗긴 것은 회복할 수 있지만, 포기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부와 번영의 상징이자 미국 문명의 첨단을 상징하는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여객기와 충돌하여 불과 1~2시간 만에 사라지는 끔찍한 사건을 보았다. 수천 명의 생명이 순간에 사라져버린 두려움과 공포의 사건을 지켜보았다. 21세기 고층문명의 첨단인 쌍둥이 빌딩과 고속문명의 첨단인 제트여객기의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 물과 양식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들에게 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저들처럼 원망하지 말자.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것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으라.'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경고를 받으므로 우리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심이다. 구약에 기록된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릇되지 않게 하시려고 2가지의 상황 경보시스템을 마련해 두셨다. 하나는 역사적인 경고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인 경고다.역사적인 경고로는 고린도전서 10장에 선명하고 핵심적으로 정리해 놓으셨다. 이 말씀이 우리를 깨우기 위한 역사적인 경고로 들려지기를 바라는 바다. 고린도전서 10장에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사건들을 통합해서 요약해놓으셨다.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느끼는 무거운 짐이 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기독교적인 사회관, 국가관, 교회관, 인생관을 분명히 확립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다니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신앙의 선배임이 분명하다.다니엘은 현실적인 사람이다. 다니엘이
그 모든 것은 결국 전도서의 선언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중주의 헛됨으로 다 귀착되어 끝난다. 결국 세상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또 이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내가 이렇게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 하라.'는 주님의 사랑으로 빚은 따뜻한 마음이 이 팔복의 말씀 안에 있다. '복이 있나니'는 감탄사다. 우리말의 '복이 있나니'에는 감탄의 뉘앙스가 있지만 원어의 이 문장은 완전히 감탄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산상보훈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매번 이 말씀은 나를 내동댕이치는 듯 한 충격을 주고, 자신감을 여지없이 꺾어 놓곤 한다. 범접할 수 없고, 격을 가름할 수 없는 높은 말씀 앞에 나를 세우기 때문이다.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니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동편 이방 사람들의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다.(마4:
성경은 넓고 거친 들판, 인적이 없는 황무지. 불모지(不毛地). 사막 등을 통칭 적으로 광야(廣野)라고 표현했다.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고, 살 수 없는 쓸쓸한 곳이요(렘 2:6), 짐승의 부르짖음이 크고 두려운 곳이며(신 1:19; 32:10; 사 13:21; 막 1:13), 약탈자들이 출몰하여 여행자에게 위험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렘 3:2; 애 4:
'예배'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아바드'는 '봉사', '섬김'이란 뜻으로, 영어의 service와 유사한 개념이다. 또 '솨하'는 '엎드리다, 굴복하다'는 뜻으로, '숭배', '순종', '섬김'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프로스'(~에게)와 '퀴네오'(입맞추다)의 합성어로, 원래는 종
여호수아는 자신의 공적이 큰 업적이 됨에도 자신의 공적에 대해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여호수아는 오직 사명에 충실할 뿐 업적을 들어내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그 일에 성공했다.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신앙고백을 확고히 하면서 백성들도 그와 같은 신앙에 분명하게 서기를 바랄 뿐이다.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넷째는 치우침이 없는 판단력과 실천력이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다.(수1:7) 한국인에게는 치우침의 특성이 있다. 공산주의를 해도 극단적인 북한 공산주의처럼 하고, 유학(儒學)을 받아들어도 중국보다 더 숭상하여 많은 폐단이 낳았다. 예수님을 믿어도 극단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치우치기를 잘하는 국민들 속에서 치우침 없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는 일을 성공한 지도자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름에 33번의 전투를 완승으로 끝낸 지도자이기에 그를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어떤 것인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대하여 여호수아서 1장에서 5가지를 일러 준다.여호와께서 새 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