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또는 조금/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
일생을 농아와 맹인을 돕고,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에 헬렌 켈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때 우리의 삶에, 아니 타인의 삶에 어떤 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막다른 곳에서 기적을 바란다. 그리고 기적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본다. 죽음 앞에서 기적을 바라고, 사업 등 망해가는 곳에서 기
사람이 누구나 감사하는 일처럼 좋은 일은 없다. 먼서 사람은 작은 것, 사소한 것, 잘 안 되는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것, 잘 된 것에만 감사를 찾다보면, 원망이 먼저 생긴다. 또한 먼 미래에 일어날 일보다는 지금 우리의 생활현장서 감사를 찾아내야 한다. 오늘, 지금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최근 생활고로 세상을 등진 ‘성북 네 모녀’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가족도 없이 세상을 등진 ‘성북 네 모녀’를 위해 시민들이 나서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는데, 오늘 삭막한 세상에 작은 인정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북구는 필자가 30년 전 교회를 개척한 곳이다. ‘성북 네 모녀’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목사인 필자는
‘공감’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감동을 받는다.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을 받기 때문에 ‘공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이었다. 나병환자가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목사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목사는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예수님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조차 가로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법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다. 특히 법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의 감동을 평생 잊지 못할 마음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긴다.어느 날, 택시 기사가 특별한 콜을 받았다. 여느 때와 같이 콜택시 요청을 받고 해당 주소로 차를 몰고 갔다. 도착해서 경적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또 한 번 경적을 울렸다.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택시 기사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국기독교역사 130년의 역사를 뒤돌아본다. 한국교회는 국가권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 말에 한국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는 왕의 절대권력과 밀착되었으며, 일본 식민지 아래서는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심지어 구약성서를 보지 못하도록
오늘 언행에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에서는 믿음과 학식, 경륜이 필요하지 않다. 돈만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양반인 시대이다. 성서는 분명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은 경전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그리스도인라고 말 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를
국민 모두가 극복해야 할 일본 아베정부의 경제보복 앞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친 아베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우리정부가 망하기를 기다리는 국민이 엄연히 우리 국민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대부분의 국민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대처하며, 정부가 대책을 세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9월 장로교 정기총회가 일제히 개회된다. 분파된 한국교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파된 상황서 교회의 예배의식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한분 하나님, 한분 예수그리스도, 한분의 성령을 분파의 교회들이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 한분은 분파된 한국교회 그 어디에도 임재하지 않는다. 또 고난당하는 민족과 상처투성이인 사회 그리고 전쟁을 부추기며, 국가
사람은 누구나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산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시간을 허비하고, 많은 헌금을 내면서 왜 교회에 다니겠는가.분명한 것은 육신이 오랫동안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한다. 풍요롭게 살기
요즘처럼 답답한 때가 없었던 것 같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은 극에 달했다. 대한민국은 매우 곤궁한 상태에 빠졌다. 정치, 경제, 문화, 외교, 군사, 종교, 남북관계 등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여기에다 노동계의 집단적인 행동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특히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행동은 종교 이기주의를 넘었다. 어려운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악인과 합세하여 권세부리는 자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 다수를 따라 불의에 가담하지 말라. 재판정에서 다수를 따라 그릇된 판결이 내려지도록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1-2절)이 성경귀절은 오늘 재판정과 직업 재판관을 전재로 한 것이 아니다. 법적 권한을 가진 공동체가 시비를 가리는 경우를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임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다. 그런데 한번 죽는 그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비록 육은 죽으나, 영은 하늘나라에 임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
‘로마평화’를 말하는 한국교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봉사할 것이라는 기대는 오판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교회에 대해서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들은 이러한 교회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혼자 가겠다고 소모적인 경쟁을 벌인다. 분단된 조국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는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선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분열과 다툼, 증오의 모습난 보인다. 그 어디를 봐도 선한 곳이 없다. 교회는 교회대로, 연합단체는 연합단체대로 다툼의 늪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 연합단체의 장은 자신이 이끄는 단체의 회원들을 향해 ‘OO끼’, ‘쓰레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범죄집단’으로 규정했
행복은 사소한 곳에 숨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행복은 혼자 사는 곳에서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너와 내가 그리고 그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행복은 찾아온다. 그것은 과거를 생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을 생각한다. 그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면 그것은 ‘만남’이다.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빼면 그것은 ‘그리움’ 이다.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곱하면 그것은 ‘행복’ 이며,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나누면 그것은 ‘배려’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도 ‘하나’ 라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어머니와 아내 중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 물음 자체가 이상하다. 누구도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고개만 갸웃 뚱 한다. 어머니는 산고의 고통을 느끼며, 세상에 나를 있게 해 준 분이다. 그렇다고 아내보다도 어머니가 더 중요하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또 어머니를 놔두고, 평생 함께 살 아내가 더 중요하다고 말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