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19년 기해년은 역사 속에 묻히고, 과거가 됐다. 2020년 경자년 희망찬 새해를 열면서, 새로운 미래, 하나님나라를 소망해 본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정치적, 교회적, 외교적, 경제적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고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은 정쟁만 일삼으며, 국민들을 진영싸움으로 몰아넣었고, 평화(샬롬)을 노래해야 할 교회는, 로마평
아기 예수의 탄생은 제국주의의 불의한 세력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는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에 의해 평정되고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 로마평화는 창과 칼에 의한 평화, 팍스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얻은 평화이다. 압제와 수탈을 강요하는 평화였다. 오늘 세계는 기독교국가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살상
사람은 누구나 원대한 포부와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몸부림을 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매우 고달프다.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부모를 잘 만나 쉽게 꿈을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는 불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나의
성서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는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재물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생명력과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재물로 인해 장관에 오르지 못하는 인사들을 많이 보아 왔고, 보고 있다. 또한 재물로 권력은 얻었는데, 민심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본다. 분명한 것은 사람 모두는 재물의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얼마 전 법원은 강남의 모교회 담임목사 안식년과 신임투표와 관련해서 변호사를 당회장으로 파송했다. 교단의 헌법에도 없는 당회장 직무대행으로 변호사를 파송된 것이다. 이는 반 헌법적이며, 종교의 자유를 훼손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교회가 속한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는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당회장은
한국교회의 선교현장은 분명해야 한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생활현장, 역사의 현장이 선교의 현장이어야 한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부여된 하나님의 선교명령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세상은 변하고, 교인들의 의식수준은 높아져 가는데, 오늘 한국교회
성서의 신명기법전, 계약법전 성법전은 약자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법전이다. 약자와 가난한 자는 구별할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자 보호가 곧 가난한 자 보호이며, 약자보호법이 가난한 자 보호법이다. 이는 약자보호법규에 가난한 자 보호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약자와 가난한 자는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3대 법전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
사람에게 있어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무슨 일을 벌이기에 앞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한마디로 잘못 선택해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아니면 기도하며, 믿음으로 선택해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선택된 백성이 되느냐(?)의 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이브라함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은 물론이고, 식솔들까지 데리고 본토를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다. 오늘 믿음의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약속은 어떠한가. 약속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일본 아베의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보복으로 인해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 아베정부는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기로 의결했다. 기득권을 유지해온 기득권자에게 있어 당황하는 모습이 역역하다. 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언론보도만을 바라보며, 의연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정부를 믿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비롯한 일본관광 취소 등 차분하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2)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사람은 왜 죄인이라고 부르는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교훈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말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행동없는 사랑은 가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말만 앞세운다
날씨가 너무 무덥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기에 바쁘다. 여름이 실감난다. 이럴 때 국민들에게 시원한 소식이 들려와야 하는데,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참담한 소식만 들려온다. 광복의 계절인 8월, 무더위와 함께 일본의 경제 보복의 소식이 국민들을 곤궁하게 만든다. 연일 메스컴에서는 일본의 경제전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권력은 백성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다수의 목사와 교인들은 대한민국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로 대망해 왔고, 대망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메시아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정적은 독립운동을 벌인 독립투사였다. 또한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친일파들과 협잡해 무수한 양민을 학살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내 마음을 열어 너와 그를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나를 개방해 완전히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애기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불안한 사회라고 말한다. 어느 사회학자는 불신과 냉혹함, 양육강식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세의 지도하에 출애급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시
사람은 누구나 버린 것에 대해서는 찾지 않는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은 꼭 찾아 나선다. 예수님은 그렇지 안으셨다. 예수님은 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셨다. 삭개오를 보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삭개오는 유대민족들이 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삭개오은 나뭇가지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다가가서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며, 오늘 너희 집에 거하겠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도 69년이 됐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민족 화해의 길은 멀고 험하다. 6.25 한국전쟁 69년을 맞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가 고백한 에 주목한다. “… 당신의 평화를 이 땅에 강물처럼 끌어들이며/민족들의 평화를 개울물처럼 쏟아져 들이는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너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네 겨레, 포로로 붙잡혀 간 네 동포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당신들이 모두 야훼 앞을떠났으니, 이 땅은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하고 주장한다/그러니 너는 이렇게 일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그들을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쫓아 보내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게 하였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외부의 침략을 받아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어 방황 할 때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언자들의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과거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했다. 그리고 성실함과 진실함을 통하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인간은 말 할 때마다 불성실하다는 말과 진실하지 못하다는 말이 수식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