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에서는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율적인 인간의 노력과 공로를 더욱 더 중요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성취하도록 가치를 부여하셨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던 아담에게는 죄를 지은 이후에 “덧붙여진 은사”(donum supreadditum)가 주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
제9장 종교개혁의 재발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최종 권위를 견고히 세우면서, 새로운 구원론과 교회론을 정립하여 개혁된 교회를 세우게 된다. 구원이란 면죄부를 구입하는 공로나 선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과 7가지 성례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미사를 폐지시켰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엄청난 재발견이었다. 종합적인 성경해석과 그를 위한 체계적인 신
루터는 세속 정권에게는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세속적 사명을 제한적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속 권세를 가진 자들은 교회에게 특권이 주어져 있는 신앙적인 문제를 강압적으로 시도해서는 안된다. 시민 정권의 통치는 복음에 의한 영적인 영역,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루터는 아담의 자녀들이 두 그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서 나타난다.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루터는 내적인 논리와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마침내 칭의를 이해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안목에서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그 어떤 행동이나 업적들을 살펴보더라도 그 속에 내재적인 의로움을 갖고 있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근거로 하여 전혀 외적인 것으로는
루터가 제기한 많은 토론 주제들 중에서 신선하면서도 잊혀 지지 않는 주제가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개념이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이 개념을 제시했다. 1517년 9월 4일, 중세기를 거쳐 오면서 모든 사람들이 따랐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가 크게 기여한 게 없다고 밝혔다. 특히 중세신학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잘못된
5. 그리스도의 직분과 만인제사장설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2중직을 감당하였다고 풀이했다. 직분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들의 구원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훗날 칼빈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이 추가되어서 3중직으로 보완되었고, 개혁주의 교회들이 공식적으로 채택하게 된다. 루터는 초기 종교개혁자로서 그리스도의 선지
루터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에서도 역설적인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진노의 하나님에 대해서 싫어할 정도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진노의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사랑과 자비를 그가 만드신 만물에 드러내셨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성경 속에다가 자신의 계시를 내리셨다. 때로는 보다 특수하게 개인별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이들 두 종류의 하나님의 감춰지심은 약간의 긴장관계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일반계시 혹은 보편 계시 속에서는 보이지 않고 감춰있다. 그분이 나타나서 십자가에 죽으신 자신의 아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게 해 주시는데, 그것은 인간을 향하신 구원이요 자비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시들 밖에서는 자신을 감추신다. 사람을 어떻게 선택하는지, 왜 다른
서구 유럽은 기독교 국가로 살아왔지만, 로마가톨릭교회가 가르쳐준 진리체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하였다. 루터가 성경에 집중하여 민감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구하게 되면서 깨우친 가르침들은 오랫동안 혼란과 혼돈에 처해있던 성도들을 깨워주었다. 루터는 인간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중심에 두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루터가 담대하게 보름스의회 앞에서도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고, 세속의 최고권위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죄에 대한 사면권에 있어서도 최종 권위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성경에만 의존하는 참된 신앙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강의하면서 고민했던 주제에 대한 해답을 터득하게
제8장 루터의 개혁사상과 특징적 교훈들 낡은 종교의 허울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수많은 어려움을 통과해야만 했다. 한 세기 앞서서 먼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의 외침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다. 보헤미안 후쓰와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등이 순교하였다. 종교개혁의 이념들은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어서 더욱 굳세게 마음을 작정한 루터와 그의 동시대의 지
6월15일 교황청에서 루터를 반동분자라고 (Exsurge Domine)을 공포하다.8월18일 루터가 『독일귀족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출판함.8월에크에 의해서 교황의 교서가 브란덴부르크에서 발표됨. 60일이라는 시간이 루터에게 온정을 베푸는 “은혜의 기간”으로 주어짐. 루터의 지지자들이 삭소니에서 지지 세력을 규합함. 9월 루터가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
7월-8월 루터와 칼쉬타트를 옹호하기 위해서 필립 멜랑히톤이 토론내용을 출판.에크는 루터가 이단이라고 공언하면서, 파리와 에르푸르트 대학교 교수진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달라고 호소함. 루터가 주장하는 것들이 위험하다는 내용으로 17개 조항들을 출판함.8월 30일 독일 콜론 대학교에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함10월초 루터가 『고해성사에 관하여』를 설교하고,
9월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카예탄에게 루터를 거칠게 다루지 말라는 것과 체포하지 말 것을 요청함. 9월 26일 루터가 카예탄과 회합을 위해서 비텐베르그를 떠남.10월 12-20일 루터가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카예탄의 환대 속에서 논쟁함. 카예탄은 루터의 58조가 교황의 선언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7조에서 루터가 고해성사를 받을 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21세의 황제는 곧 바로 내전에 휘말려서 주변 상황에 대해서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루터를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망설이게 되었다. 5월 12일,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과 네델란드 국경을 넘어섰고, 합스부르그 왕국을 공격했다. 프리드리히, 브란데부르그의 알브레흐트, 헤세의 필립 등 독일지역 군주들은 5월 25일 회의가 폐회되기 이전에
1521년 4월 17일, 오후 4시에 창백한 모습으로 루터는 의회 앞에 세워졌다. 중앙 탁자에는 루터의 저술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당신이 이 책들을 쓴 저자임을 확인해 주겠는가? 이들 가운데서 전부 혹은 일부라도 취소하겠는가?” 처음에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루터는 돌아서서 24시간 하룻 동안 잠시 생각할 시간을
둘째, 종교개혁이 큰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를 지도하는 지식인들과 리더들의 도움과 지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15세기 말 유럽에서는 지식인들을 위한 혁신적인 활자 인쇄기술이 등장했다. 20세기에는 컴퓨터의 보편화가 이뤄짐으로써, 1980년대 말과 1990년도에 세계 지식정보 산업에 새로운 혁명을 도래하였던 것과 비슷하다. 활자 기술의 발전으로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13세기에 정립된 7성례는 가장 비성경적인 은혜 주입설을 정착시켰다. 로마가톨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성례주의를 반복적으로 집행해 왔으나, 루터의 반론에 의해서 재정립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임직식, 결혼식, 장례식, 견신예식 등은 은혜의 수단들이 아니라고 루터는 확신했다. 로마 교회에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신부만 시행하는 것이기에, 다른 일들은 저속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귀족들은 서민들을 보호하고 외부의 공격에서 지켜주어야 한다. 로마가톨릭이 훔쳐간 권세를 다시 찾아와서 순전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고 루터는 촉구했다. 루터는 로마
또 다른 잇슈는 성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시행해 내려온 성찬의 기능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에크가 루터를 짓밟고 핍박하면 할수록, 점차 교황권의 조치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만 갔다. 갈수록 더 낳은 의혹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는 6월 29일 권위에 대해서 설교했다. 마태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