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인간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지구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한 신(하나님)을 믿는다. 그것은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들도, 잘난 교단의 교인들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같은 주기도문을 외우며, 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부르면서 한국교회가 분열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였다.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셨고, 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시인 김지하는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고 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살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이들이 있는 곳이 예수님의 ‘삶의 자리’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또 예수님이 좋아서 무조건 따라 다녔다. 예수님은 이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살았다. 그는 예루살렘의 도시로 가지 않았다. 제자들과 농촌을 돌아다녔다. 특히 예수님은 이들이 수난당하는 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한국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선 한국의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인이 된 것이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 아니 이전의 기독교인들은 한국인에서 기독교인으로 이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교인들
오늘 세계는 생태학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인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세계가 무기경쟁을 벌이면, 얼마안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생태학적 위기가 찾아온다고 예언자적 절규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다. 개신교 목사인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무기경쟁의 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기술문명을 독점하는 자들이 이런 예
광복 73주년, 분단 73주년, 동족상잔의 비극 6.15 68주년을 맞은 오늘, 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주최가 되어, 민이 중심이 되어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하며, 노래하자는 것이다. 또한 성서적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처음 이스라엘은 부족동맹으로
20년 전만 해도 한국교회의 주류들이 주체가 된 대규모 집회들이 곳곳에서 많이 열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매머드집회의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대규모 운동경기나, 인위적인 축제의 의미 이외는 두지를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머드 집회를 주관하는 몇사람의 축제이상의 의미가 없다. 우리민족의 현실과 별 상관이 없는 집회라는 것이다.
바알의 물신숭배가 노예화하고, 몰록 신들이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 특히 어린 생명들을 제물로 요구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질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로 돌아가야 하며, 보잘 것 없는 이웃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고통당
성서는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교훈을 주고 있다. 성서의 처음은 생명의 탄생과 하비루들의 해방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살인한 카인에게 표지를 달아주면서,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배의 벌을 내리겠다고 선언한다. 카인은 살인자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표지를 달아주었다. 비록 범죄를 했어도,
처음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때, 수명을 다한 조선조 500년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한국은 중국대륙의 세력을 유일한 국제관계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한국인은 세계에 대해 무지했다. 갑자기 휘몰아친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졌을 때, 조선조는 그것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몰려든 강도들의 틈바구니에서 나약한 어린아이처럼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무조건 따랐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님이 무조건 좋았고, 예수님은 이들의 삶의 현장에 있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 다녔던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파리새들이 내세운 체재와 계율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지를 않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헌신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아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남녀사이의 깊은 갈망, 본능적인 그리움을 개인적으로는 쾌락의 충족인지는 모르지만, 인류의 종족을 유지하는 방편이며, 인류의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이다. 남녀의 애정은 죽음보다도 깊다. 모든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으로써 죽음을 넘어서서 인류의 생명을 실어 나르고 있다. 남녀의 사랑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창조의 섭리에 속한 것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의 종이 되로록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섬기는 사랑에로 해방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기는 사랑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요한1서는 명쾌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때문에 인간은 사랑 속에서만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공허하며, 거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일을 하시고, 이렛째 되는 날 되는 날 휴식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휴식은 창조적 기쁨과 생명이 가득한 안식이었다. 갈등과 대립이 없는 평화로운 안식이었다. 이 안식은 창조의 안식이며, 인류 역사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자신의 안식을 약속하셨다(이브리서 3장과 4장)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날에 하나님의
중세에는 신학과 기독교적 윤리가 사회적, 경제적 삶을 결정지었다. 인간은 종교적 구원,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이 궁극적 목표였다. 때문에 인간의 지상에서의 경제적 삶, 그것을 위한 질서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것은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종교적 질서가 세속적 삶이나, 경제적 필요에 선행했다. 경제적 사고는 전적으로
문제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다. 또 5월 중 연일 전대적인 발언을 쏱아내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제3차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기도해 온 터에 너무나 감사하다. “하나님
19세기 최고의 사건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이다. 이를 세계화라고 하며, 경제와 윤리의 문제가 강하게 제기됐다. 이성적 합리성에 기초한 시장경제원리, 아니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윤리라는 당연한 원리가 통할까? 인간들 사이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도덕적, 종교적 원리들이 선행어야 하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엄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 24절)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의 관계가 양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인에서 사제들 가운데 돈이 어떠한 위력을 가졌는지를 보았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예수님은 변방 갈릴리 출신으로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그곳은 예수님의 생활현장이었으며,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저희 것이다”(누가복음 6장 20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