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아무 형상도 만들 수 없고, 둘 수도 없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의 명령 때문이다. 가톨릭에는 우리의 제2계명이 없다.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제9와 10계명을 만들고, 제 2계명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은 아무(?) 형상이나 만들어 섬기고, 조상제사도 지낼 수 있게 했다. 또 가톨릭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
얀 후스(Jan Hus. 1372~1415.7.6. 체코)는 모든 권위 즉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경이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한다. 사람이 성경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순종하려는 의지가 생겨나 이것이 행위와 삶으로 이어진다.”고 했다.후스는 성경이 교황의 권위보다 단연 우위에 있으며, 진리에 순종
중세 로마가톨릭은 말씀을 버려 세속화되고, 형식화, 교권 화되어, 타락한 부패공동체였다. 신앙이나 정치나 어느 제도도 오래되면 형식화되어 석화(石化)현상이 일기 마련이다. 나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들도 제도나 형식,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형식과 전통을 과도하게 중시하다보면 형식이나 절차에 사로잡혀 시대와 흐름에 반응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생명력을
한 사회학자가 현대사회를 ‘소외당한 인간을 양산하는 온상’이라고 말한바가 있다.시편 128편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의 복을 노래한 시(詩)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시편 28편을 “그리스도인의 결혼축가”라고 했지만 오늘 우리네 가정문제의 현실을 생각하면 현실의 절벽이 너무도 깊어 문제해결하기를 포기하게 하는 절망의 어둠이 덮쳐온다.왜 이 사회가 이렇게 고
‘평화’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 두개가 있다. PAX와 SHALOM이다. PAX는 강대국 로마가 추구하였던 평화이고, SHALOM은 로마의 식민지였던 히브리민족이 추구하는 평화다.샬롬의 히브리어는 평화, 조화, 완전성, 번영, 복지와 평온 등을 의미하며, 만남과 작별의 인사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샬롬은 두 개체 사이의 평화 특히 하나님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용서는 단순히 시간과 함께 잊어버리는 망각의 행동이 아니다.내가 용서받은 사실 때문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결단이 그리스도인의 용서다.용서에는 희생이 따른다. 용서는 마치 받을 돈을 받지 않기로 하는 것과 같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용서는 손해를
하나님은 화평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하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당신께 도전하고, 품을 떠나 원수가 되어 버린 인류를 왜 친히 찾아 오셔서 속죄하시고, 당신과 화목하자고 하시는가.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의 이미지를 문 밖에 서서 집 나간 자식이
한국교회는 하나님 중심, 즉 성경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중심으로 개혁되어야 한다.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은 하나님 사상이다. 인본주의를 거부하고, 신본주의를 따른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며, 인정하는 신앙과 태도를 가짐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여 어떻게 갱신되어야 하는가. 회복의 방향을 말함이다. 회복의 방향성을 바르게 갖지 못하면 갱신도 불가능하고, 그 뼈를 깎는 갱신마저도 의미를 잃는다.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개혁 운동은 어떤 제도를 바꾸거나 태도 또는 습관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어야 한다. 500년 전 루터가 9
지난 해 10월 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을 넘기고는 수년 동안 화두가 되고, 한국교회개혁의 열망을 담았던 목소리는 기념주일을 기점으로 올림픽 성화가 꺼지듯 그 열기(熱氣)가 한 순간에 꺼진 듯 한 형국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들에 부딪혀있다.각 교단들의 돈 선거현상은 세상의 윤리수준에 미치지 못하여 출마자들의 겁 없는 돈 뿌림도
금년은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궐기했던 3·1운동의 98주년이 되는 해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장엄하게 낭독된 이 독립선언문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전국에 만세 삼창 소리가 퍼지던 그때, 그 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그 위대한 선
바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교회를 보존하고, 이끌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한다. “삼가시오.” 그리고 “경계하시오.” 사도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한다. 무릇 영적 지도자는 자신을 다스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성도들의 믿음을 진작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지도자는 주신 복음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도록 삼가야
다섯 가지의 솔라(Five Solas)는 종교개혁의 핵심가치와 그 정신을 담고 있다.뿌리 없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의 뿌리가 없는 성도 역시 불가능하다. 종교개혁은 구원론에 대한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그 사상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Faith Alone)로 압축될 수 있다.로마가톨릭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선행을 더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창세전에 우리를 아들로 부르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신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가 우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을 심령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성령의 사람들이다.(고전3:16-17)우리 모두는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다. 날마다 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 년 동안 블레셋의 속국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세워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역하게 하셨다. 삼손은 극적으로 등장해서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최후를 마침으로,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 간 역사적 인물이다. 히브리서 11장 32절은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겼다. 소리도 요란하고, 색깔도 창연한 듯 했으나 그 무엇을 남겼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채, 오히려 한국기독교의 적폐와 같은 분열만 가중(加重)시킨 체 그냥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겼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퇴색됨이 없이 선명하기만 한데 우리네 습성처럼 기념주일을 넘기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냥 썩고 냄새나는 그
누가복음 1장을 읽으면서 언제나 읽는 말씀인데 새삼스럽게 진한 감동을 받은 장면이 있다. 천사가 나사렛이라는 작은 촌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라고 말씀을 전하는 광경에서 온 몸이 뜨거워지는 감동이 나를 휘어 감음을 경험했다.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
노산 선생의 시(詩) [고지가 바로 저긴데]는 1954년 제야에 쓴 작품으로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첫 수)" 이 시는 6.25 민족전쟁 중에 잃었던 수도 서울로 환도(還都)되고, 휴전이 협정된 상황에서 통일에의 의지와 비원을 노래한 이은상(李殷相.
기독교를 NAVER 백과사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섬기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다시 페르시아ㆍ인도ㆍ중국 등지에 전해졌는데, 11세기에 그리스 정교회가 갈려 나간 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시 16세기
주의 제자들은 속히 임할 세상 종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곧 도래할 것 같았던 세상의 종말은 2천년을 넘겼고, 초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종말의 문제는 종교의 몫으로 삼고 관심 없이 살거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근본주의나 극단적 신비주의자들 또는 이단이나 사이비한 자들의 역한 주장쯤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