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 한 유대인 성직자의 지혜를 묵상해 본다. 한 유대인 선교사는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 골목길로 산책을 나왔다. 이 선교사는 산책을 하면서 누구를 만나든지 웃으면서 "안녕 하세요!" 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인사를 잘해 동네사람들과 매우 친해졌다. 이 동네에는 '밀러' 라는 하는 젊은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유난히 이
명심보감 교우편에 노요지마력(路遙知馬力)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이란 말이 있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 가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먼 길을 가야만 말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며, 일이 꼬이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서로 겪어 봐야 상대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혜안(慧眼)이란? 사물(事物)을 꿰뚫어 보는 안목(眼目)과 식견(識見)을 말한다. 옛날 애꾸눈에 외다리이면서, 난쟁이 몸을 가진 채 자존심(自尊心)과 열등감(劣等感)이 아주 강한 장애인 왕이 있었다.어느 날 그 왕은 그 나라 제일의 화가를 불러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화가는 왕의 의중을 자기 생각으로 추측하여 정상적인 다리 둘에, 정상적인 두 눈에,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분단의 현장에서 남과 북이 하나되는 민족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봉사하고,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해 보자. 또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청드리자.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자.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하나님
경제적으로 잘산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엄마와 아빠가 사랑해서 낳은 아이들,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이 왜 친부, 친모, 양모, 양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가.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의 소리’, ‘한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다. 폭력에 시달리며, 학대받는 아이들의 아우성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지난 2017년 정유년 한해와 20
다음달 1일이면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99년이 된다. 한국교회의 역사 왜곡은 그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심각하다. 한국교회가 아니 한국기독교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민족분단의 중심에 교회가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민족구원이 마치 앵글로색슨족의 선교의 계기가 된 것처럼 오도한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성만찬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그 만찬은 유월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는다. 이 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과 해방을 위한 희생제물이다.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양의 죽음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교리적으로 대속적인 죽음으로 규정되었다.
지난해에도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 살해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최근 전주에서 일어난 고준희 양 살해 및 유기사건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사악해진 우리사회의 현실과 맘몬에 길들여진 나머지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잃어버린 우리사회, 욕망과 욕정에 자로잡힌 우리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부모에 의해서 사회적 약자인
흑인해방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부인은 그가 암살당한 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축사를 했다. 그 축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요. 백악관으로 오실까요. 부요한 백인들의 교회로 오실까요. 아니 그 분은 할렘가로, 가난과 범죄가 들끓고 인간들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그곳으로 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이 때, 정말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다. 매서운 추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르신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덮어주고, 응급조치를 한 이야기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엄창민, 정호균, 신세현 학생은 최저 기온 영하 11도인 지난 11일 오전 8시경 등굣길에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시장에서 한 노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발견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시작했다. 이곳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오셨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계셨다. 또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과 맞섰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셨다. 그런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2천동안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처절하게 묵살당해 왔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리적 신앙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사람의 생각으로 교리화해 버렸다. 실존적인 예수님의 역사성을 증언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로부터 근본주의적이며, 정통주의적인 보수적인 신앙을 그대로 답습해, 예수님을 초월적이고, 신적인 존재로서만 생각해 왔다. 예수님의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강한교회, 큰교회, 돈이 많은 교회,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부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라고 평가한다. 그렇지 못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지재하고 있는 사고는 십자군적 사고방식이다. 고 손규태 박사는 신학자 폴 틸릭의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제2, 3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교회도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십자가도 교회의 지붕이 아니라, 가장
평화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증언했다. 참된 평화는 무기에 의해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평화를 해치는 무기와 이념을 파괴해 버린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노래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지를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한분은 이 땅에 평화를 주고, 하늘에 영광
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에서 여중생들이 또래를 집단으로 폭행해 피투성이로 만든 사건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강원 강릉에서도 여고생 등이 또래를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드러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천, 서울, 천안, 세종 등 전국 곳곳에서의 폭행사건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부산 사상구 목재 공장 앞 공터에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는 가운데, 90대 고령의 장인이 부양 문제로 자식들이 말다툼을 하자 격분해 40대 사위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됐다. 장인은 자신의 자택에서 막내딸과 큰딸이 부양을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나 막내딸의 뺨을 1회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순간 자신의 아내가 맞는 소리가 나자 사위가 장인에게 대들었
먼 길을 단숨에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인생은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사명은 삶에서의 순종입니다. 영적 쉼에 대한 조용한 준비는 힘을 더하는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어느새 찾아온 100세의 삶, 그것은 얼마나 쉼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가끔은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의 오만함이 쉼을 부끄럽게 합니다. 평생목회를 꿈꾸며 원로목사님들
오늘 한민족에게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서양의 역사에서가 아니라, 현재적 분단된 이 민족의 상황에서 다시 고백되어야 한다. 이 땅의 여종들이 광복 72주년을 맞아 8천만민족을 위한 기도성회를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역사와 서양기독교, 문화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압박민족의 역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