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에 달을 띄어찻잔에달을 띄어마음 뜨락 밝힌다어느 먼 곳 나들이 간 생각도 불러들여내 안에 나를 모시고올리는 아늑한 제의 -시집 『구름운필』에서 * 김정희 시인: 숙명여대 국문과.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조문학상 한국예술상 한국문협진주지부장 사)한국시조문학관 관장 달 띄운 찻잔과 화자의 마음 안 생각을 동일시하여 구성된 다양한 이미지를 하나로 융합하는 모습을
하늘면도날을 사용한 듯, 머리 위 저어 높이에서부터 지평선 저어 너머까지주욱 내리 그은 칼금,의주욱 갈라진 틈새,의뒤쪽이 내다 보이고…… 가맣다며칠째 갠 날이다 아침에는 A4용지에 손끝을 베이었다 시란 무엇일까? 눈이 부시도록 높푸른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많은 시이론가들이 시에 대한 정의를 내렸지만 이렇다 할 결론은 없다.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그러므로 지치지 말지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집 『천년의 바람』에서* 박재삼 : 1933년 ~ 1997년 (향년 64세) , 고려대학교 국문과,
가을날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노목의 연가 - 어느 노목 아래서수십 년 흙먼지 묻은 덧거리벗어 던지고초연한 모습으로새로운 연분을 바라며노목은 옷매무새부터 매만진다.긴 세월 지나 이제야 흙투성이 누더기가 부끄러워바스스 일어난 무지렁이 노목은 어떤 미련도 없이 이제껏 맺어온 이음매를 푼다.세월의 흔적 이리저리 엉켜매듭 매듭마다 맺혀 있는 바닥난 기름 등불 켜는 어수룩한 노목 같은 노인이영원
놀란 강강물은 몸에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모래밭은 몸에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새들은 지문 위에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꾹꾹 찍고 돌아오는데그래서 강은 수 천리 화선지인데수만 리 비단인데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수십억 장 원고지인데그걸 어쩌겠다고?쇠붙
'청보리밭에 오는 봄'진눈깨비 날리던 겨울엔 생솔가지 군불 지핀 아랫목 뜨신 맛에 살았다 이불 홑청을 벗기듯 청보리밭 살얼음 녹이는 돌개울 물소리 비늘 돋친 바람에 실리는 씀바귀의 봄 몸살 은쟁기 보습에 뭉툭뭉툭 겨울이 잘려 나간다 젖은 나목의 가지마다 불을 켜는 눈망울들 오요요 기지개 켜는 버들개지 夢精하는 들녘 내 이제 들로 나가 더운 피 흐르는 흙
오후가 길었다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는데나는 그것이 악보인 줄 알았다세상이 시끄러우면 아버지는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어린것들의 앞날을 염려하셨다바람이 몇 번이나 풀들 사이를지나가는지 세어 보았다오동꽃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피었는데나는 그것이 보루(堡壘)인 줄 알았다세상이 시끄러우면 어머니는지는 꽃의 마음으로어린것들의 앞날을 염려하셨다꽃 핀 쪽으로 가서
생일 아침면도를 하다가 거울을 봅니다도금이 벗겨진 메달 같습니다의류 수서함 앞에 떨어진 속옷이나멍이 달짝지근한 복숭아 낙과나한겨울에 쫓겨난 아이의 맨발 같기도 합니다아직 한참을 늙어야 할 얼굴입니다어떤 표정이 오늘을 길러 왔을까요아침은 처음부터 아침이었을까요*김병호 : 협성대학교 교수, 문화일보 신춘문예,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 시는 언어로 만든 회화라
곰소항 밖으로 벋기보다 속을 내준 작은 포구 해감내와 비린내가 꿰미에 걸릴 동안 느릿한 구름 배 한 척 무자위에 걸려 있다 한때는 누구든지 가슴 푸른 바다였다 갈마드는 밀물썰물 삼각파도 잠재우는 소금밭 퇴적층 위로 젓갈빛 놀이 진다 제 몸의 가시 뼈도 펄펄 뛰는 사투리도 함지에 절여놓은 천일염 같은 사람들 골 패인 시간을 따라 뭇별이 걸어온다 시는 언어로
겨울 자연自然나의 자정(子正)에도 너는깨어서 운다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들은 끝없는 눈밭 속을 헤맨다.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해체(解體) 되지 않는 영원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나의 자정(子正)을 부르느냐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광막(廣漠)한 자연이 되기까지는너는 무광(無光)의 죽음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幽閉)허나 世上을 깨우고
방문객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만남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만남은 한
여름성경학교첨탑의 십자가가 하늘에 대고, 누적된 것을 긁는다. 죄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는. 예수는 지금쯤 교회 지붕에서 투신할 준비를 마쳤을지. 어린이들은 긍휼이라는 달고 시원한 빙과를 조금씩 녹여 먹고 있었다. 올해도 심판은 불발. 나는 어젯밤 술이 덜 깬 일개 교사이며, 성경을 완독한 적이 없다. 상처는 때로 훌륭한 장난감일까. 새 신자의 자살 소식이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은은한 걸음으로 간다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은은함이 강물이 되
동지섣달열엿새 기망(旣望)둥근 만월 하늘을 채우다엄동쨍그랑 소리 나는강추위하늘도 검푸름으로밤물결 너울 이는한강 길따사로운 가슴으로 둥근 달 한 아름 안고 함께 걷는 두 연인 -창조문예 17년 4월호에서 * 한상원『心象』으로 등단. 연세대학교 부총장 한국문헌정보학회 회장. 국제도서관 협회연맹 이사시집 『편지』 『그대는 나의별』 시의 정의 중 하나인 언어로 그
어머니의 그륵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그래서 내가
별과 고기밤에 눈을 뜬다그리고 호수 위에내려앉는다.물고기들이입을 열고별을 주워먹는다.너는 신기한 구슬고기 배를 뚫고 나와그 자리에 떠 있다.별을 먹은 고기들은영광에 취하여구름을 보고 있다.별이 뜨는 밤이면밤마다 같은 자리에내려앉는다.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먼 하늘에 떠 있다. 지난 4월 8일 황금찬 시인께서 향년 99세로 하
봄 길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보라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 있다 우리는 살면서 길을 찾아 나선다. 스스로 길이 되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
그것은, 하늘 아래처음 본 문장의 첫줄 같다그것은, 하늘 아래이쪽과 저쪽에서길게 당겨주는힘줄 같은 것이 한 줄에 걸린 것은빨래만이 아니다봄바람이 걸리면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비가 와서 걸리면떨어질까 말까물망울은 즐겁다그러나, 하늘 아래이쪽과 저쪽에서당겨주는 힘그 첫 줄에 걸린 것은바람이 옷 벗는 소리한 줄뿐이다 오랜만에 정겨운 시어 “빨랫줄”을 읽는 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