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이후, 거리를 배회하던 떠돌이와 걸인, 농상공업자, 소작인, 가난한 농민들이 교회로 몰려왔을 때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기독농민과 소작인들은, 소작쟁위 등을 일으켜 일본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쟁위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소작쟁위나, 노동쟁위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
우리의 딸이며, 아들인 준희와 원형이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 또 하늘에서 사무친다. 죽임을 당한 준희와 원형이가 억울해서 땅과 하늘에서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죽임은 이 나라에서 학대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고, 나라다운 나라, 가정다운 가정, 건강한 사회에서 아이들이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가게 해 달라는 피맺힌 ‘한의 절규’이다.그래서 부모와 이
연말연시에 끔직한 사건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안장에 전해졌다. 2017년을 보내면서 안방에 전해진 고준희 양 살해 및 주검 유기사건은 국민들을 공분에 휩싸이게 했다. 성경전서 창세기 4장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은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고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을 향해 묻고 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불의한 권력과 회개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들이 많다. 그 중에 한사람이 아모스이다. 아모스는 남쪽 유대나라 드고야에 사는 농민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목자요, 들에서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암 7장 14절) 그는 유대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나라들의 악행을 보면서, 아파하는 농민이었다. 하나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따먹고 타락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일반적으로 좋고 나쁨을 의미한다.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의 기준을 자기자신에게 두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이후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등 범죄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한마디로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존재로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
교도소는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 놓은 강제적인 장치다. 교도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면이며, 이 사회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사회와 분리시킬 수 없다. 이 사회는 교도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과 교도소에 상습적으로 출입하는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교도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성서에 나타난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나라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비유이며, 하나님나라운동에 관심되어 있다. 산상설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저들의 것이다”고로 시작한다. 누가복음 11장 20절도 악귀를 쫓아내어 질병을 고치는 행위도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표징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나
지금 세계는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선언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는 말을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한다면, 가난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전쟁보다도 심각한 것은 식량의 무기화이다. 성서의 경제관은 한마디로 ‘나눔’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간의 높은 벽이 무너
오랜 세월 동안 히브리 노예들이 맞본 뼈아픈 고통과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신앙에 담겨 만들어진 것이 구약과 신약, 성경이다. 그래서 히브리민족의 역사는 억눌린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날, 승리하는 날을 학수고대한 기다림의 역사였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기를 온 맘과 온 몸으로 기다렸다. 이런 희망과 기대가 하나님나라에 대
500년전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기독교복음 내용과 교회 질서의 파탄에 대항해서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교회개혁의 횃불을 들고 투쟁을 시작한지 500년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며, 이벤트적인 행사에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계교회의 개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성서를 가난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구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시련을 주제로 하고 있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병들고,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에 벌인 역사적인 사건들에 의해 생겨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기 1장 1절)성서는 이 첫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그래야만 성서의 세계를 들어 갈 수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 할 수 없다. ‘한 처음’을 생각하면, 그 보다 앞선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가 평면적인 것 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무한한 과거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다. 힘이 드는 것은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벌어서 살아가는 이 땅의 가장 소외된 이웃들의 노력마저도 헛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가진 자들의 비리와 부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낮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출애급기 16장3절) 실제로 노예생활은 배부른 생활이 아니다.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된 상황에 비해 최소한 생존이 허용되었던 노예 생활을 미화시킨 성경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굶주린 이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산 위로 데리고 올라갔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두가 장담하기 어려운 유혹이다.사탄의 예수님을 향한 유혹은 성서의 말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2번째 시험은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고 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이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를 이용한 시험이다. 하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가복음 4장3절)배고픈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빵이 중요하다. 사실 육체들 가진자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물질이다. 그래서 물질이 풍성할 것이요. 물질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자를 메시아로 모실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이야기 속에서도 겨울에 먹을 양식과 땔감, 그리고 김장만 준비하면 행복하다고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에서 “때가 이르렀다. 회개하고 세레를 받으라”고 외쳤다. 소외되자, 천박한자, 가난한자, 떠돌이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목격했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