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종교개혁의 사건을 기념하는 5백주년을 맞이하고 있으므로, 그의 사상과 영향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의 신학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매년 10월을 종교개혁의 달로 정하여서 반성과 다짐을 해 오고 있는 것은 루터의 유산이 남긴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루터가 남긴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크고
지금도 비텐베르그 대학교 박물관에는 루터 당시 판매되었던 다양한 종류의 면죄부들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비텐베르그 박물관에서 온갖 종류의 면죄부들을 목격했다. 당시의 모든 평신도들에게 로마가톨릭의 허구적 교리를 깨우쳐 준 루터의 희생적 수고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이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루터의 선구자적 노력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3. 관습과 허황된 관행의 반성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이자, 응축된 신앙의 표현은 루터의 95개 조항에서 표출되었다. 루터가 주장했던 바는 면죄부 판매를 고치자는 것이었다. 면죄부 판매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면죄부을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이 구출되어서 나온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95개 조항 속에다 루터가 기독교 신앙의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올바른 지침을 주려는 목양적 관심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성경에 입각하여 허망한 미신숭배와 면죄부 판매를 거부한 후, 전체 교회를 재건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립하여 나갔고, 성경적 가르침이 널리 확산되었다. 중세 말기에 내려오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과 성례주의 신학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된 것이다.
2. 위대한 업적들에 대한 재평가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은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된 이후로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적 혁명을 이루어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를 놓고서 논의가 많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주된 목적은 참된 교회를 회복하고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이요, 교회의 체계를 파괴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련과 성취의 영향으로 기독
이들은 농민혁명가 토마스 뮌쩌 이후에, 독일 뮌스터에서 벌어진 재세례파의 극렬한 무정부주의 난동에 대해서 엄중하게 대처하면서, 비합법적이라고 비판했다. 칼빈이 1539년에 펴낸 로마서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가 가장 극명하게 종교개혁과 혁명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실제로 모든 세상 권력이 다 폐기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
제1장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종교개혁은 루터가 처음 시작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으로 성취된 복음의 회복운동이요, 지금도 계속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의 전개 과정에 들어있는 정신이다. 루터 스스로가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어떤 성취나 업적에 대해서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필자는 종교개혁에 대한 입체적 해석을 최근 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해서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루터의 95개 조항을 새롭게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았다. 면죄부의 문제점을 밝힌 95개 조항을 8가지로 분석했고, 만성절의 허구성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했다. 루터의 주요사상과 종교개혁자들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도록 재구성하였고, 오늘의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면 어떤 상태가 회복되는가? “깨끗함과 참된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작동하는 사람이 된다 (고후 6:6-7). 힐링을 받은 사람이 내놓는 말은 자비와 사랑과 진리의 말씀이 된다. 명철한 지혜자의 말은 상처들을 싸매어주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한다. 솟구쳐 오
둘째는 신사참배를 문제를 회개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방법과 주체를 놓고서 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서는 교단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찬성했거나 동조한 목사들과 장로들의 복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1945년 9월 2일, 부산에서 20여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재건운동을 주도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9월 18일에는 한
개혁주의 신앙을 물려받은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도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와 이교숭배의 강압 속에서 연단 받았다. 한국 기독교는 무지한 자들의 곡해와 압제자들의 탄압과 말살정책 속에서 분투노력하였고,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든 시련을 당해야만 했었다. 이것은 한국 성도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고난의 신학”이요, “성육신의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말하는 “
# 한국교회의 순교신앙과 혼란스러운 계승작업한국교회가 체험한 신앙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게 형성된 사상은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와 고난을 이겨내면서 희생을 감수하는 순교신앙이다. 비록 다 순교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사각오의 신앙을 보여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사화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받아들이는 한국 기독교의 기념비에 해당한다고
구약성경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과 심령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생각하면서 회개하였다 (신 302).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므로 전인격적이다 (삼상 7:3, 사 29:13). 회개는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온종일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음식을 금하면서
3. 말씀과 죄의 회개, 한국교회의 분열초대 한국교회는 역사적 칼빈주의 개혁신앙에서 은혜의 수단(media gratia)으로 강조하는 세 가지, 즉 말씀, 기도, 성례를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입게 되어는 방법은 직통계시나 개인적인 신비적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라, 공적인 모임에서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일어나
그는 이미 2년 여 전, 1907년 1월 15일부터 일어난 평양대부흥 운동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죄를 회개하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한 바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면서 통회 자복하던 놀라운 현장을 가장 감동적으로 체험한 분이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 평양대부흥 운동은 모든 한국교회를 감동시켰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앞 다투어서 성령의 불길
1907년 한국교회가 체험했던 영적인 감동을 대부흥운동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과 증언에서 나오는 내용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노블(Mattie W. Noble)은 평양대부흥 운동의 회개 기도와 화해 운동이 나타난 것을 설명하면서, 머리에서 이루어진 회심 (head conversion)이 점차 가슴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슴의 회심
“나는 하나님을 거슬린 죄를 지었습니다. 이 교회의 장로로서 나는 강유문씨를 미워하는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방위량 목사님을 미워했습니다. 목사님 나를 용서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까?”블레어 선교사에게 악감을 품은 것을 회개한다고 하면서, 눈물로 질투했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하였다. 블레어 선교사는 자신의 일생에
그레엄 리 선교사는 그날의 “부흥의 시간” (the time of the revival)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오순절을 상기시키면서, 성령님은 사도행전 2장의 기록처럼 항상 회오리 바람처럼 임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항상 조그만 소리로 말씀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집회 장소는 남자들은 한쪽으로 모여서 앉았고, 여성들은 다
1월 12일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방위량)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설명하면서 매우 쉽고도 분명하게 복음의 핵심을 제시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말씀에 의거해 “불화와 일치”(discord and unity)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한 손가락 끝이 잘렸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