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찬 목사

영국의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르면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제들과 그들의 제의와 교리 때문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아니 계시종교는 예외 없이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사제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세력을 장악한 자들은 교리를 만들어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은 물론, 교리적 갈등을 유발시켰다.

종교는 그 역사적 과정에서 항상 진리를 거역하는 일이 생겼다. 그것을 허버트는 ‘종교의 타락 원리’라고 했다. 이것은 영국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교리논쟁과 교파싸움을 벌이다가 장로교단은 300여개로 분열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교단과 교파가 실존하고 있다.

허버트의 이론은 기독교신학의 일반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종교를 사회적 관계에서 연구하는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는 허버트의 프로그램에 대한 대안을 정반대로 만들어 냈다. 교파 간, 종교 간의 화해를 위한 적극적인 태도이다.

홉스는 종교 간의 평화는 자연적, 이성적 원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교회를 발전시킴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국가권력이 종교의 권력을 장악해야만 다양한 방향을 가진 교파들 사이의 분열과 다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홉스의 사상은 그의 인간관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간은 늑대이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대 만인의 투쟁’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를 통제할 유일한 수단은 국가 뿐이라는 것이다. 홉스는 종교의 갈등을 인간본성에서 파악했다. 때문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성직자들을 국가기관의 통제아래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면 로크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했다. 교파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와 종교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 놓았다. 그가 쓴 종교를 사이의 ‘관용에 관한 편지’는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편지 서문에서 “종교적 관용을 참 교회와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표식으로 간주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로크는 국가 또한 관용자세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게을리 하면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신학적으로도 교리가 사회에서 갈등을 초래할 경우, 전통적 교리를 피해서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다 오늘 교회 내에서, 교단 간, 교파 간, 종교 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다툼이 끊이지를 않는 것은 로크가 말하는 관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교회와 이웃교단, 이웃종교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화합하고, 갈등과 다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나, 로크의 이 같은 입장은 허버트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인식 원천의 척도로 보면 ‘이신론자’이다. 이신론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개신교들 사이에 교리적이고 교파적인 갈등과 대립에 직면하게 되었다. 때문에 유럽사회는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계시나, 교리의 범주로 해석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등장한 것이 ‘이신론’이다.

영미의 정통신학을 받아들이고, 교리주의에 빠져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이웃교회와 이웃교단, 이웃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교리와 교파주의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면,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 분열과 갈등, 그리고 다툼만 계속 될 것이다.

예장 한영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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