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람의 일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요셉의 형들이, 이제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 엎드려 자기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걸하는 장면이 있다(창 44:18-34).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에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요셉이 친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좀 수상하다. 장남 르우벤이 나서지 않고, 넷째인 유다가 나선 것이다.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파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활달한 성격으로 세상 여자가 모두 제 것인 양 활보하다가 며느리 다말과 동침,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이기도 하다. 그런 유다가-아직 요셉이 자기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이기는 하지만-요셉 앞에 무릎 꿇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물론 유다의 등장은 장차 유다 중심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예시이기도 할 것이다.

어찌 됐든 지금 유다에게는 요셉을 미워할 때의 흉악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요셉을 잃고 괴로워하는 아버지 야곱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렸던 게 분명하다. 루터는 이 유다의 간청을 ‘기도의 표본’이라고까지 했다. 기도에 들어 있어야만 하는 참된 감정이 온전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께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역시 극적이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개에게 던져 줄 수 없다”고 한다. 과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일까 싶을 정도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면 옛 시리아 제국을 다스렸던 페니키아 후예로서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다. 지체 높고 자긍심 강한 특권층 여인이다. 이런 여인이 예수께서 자기를 개 취급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나는 개나 다름없습니다.’(막 7:29) 라고 응수한 것이다. 병든 딸을 고치기 위해 체면이나 신분 따위를 훌훌 던져버린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여인을 향한 예수의 말씀이다. 참된 구원이 어디서 오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민경욱 대변인을 통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고 했다. 헌재 판결에 불복한다는 메시지다. 과연 그런 태도로 국민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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