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임종을 앞둔 야곱이 12아들을 불러 각기 장래 일을 축복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창 49:2).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인물이다. 그럼 왜 야곱과 이스라엘을 말했을까? 고치 속의 애벌레에게 나비의 꿈을 꾸게 하는 것처럼, 야곱이라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머물러 있는 아들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인류의 비전을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야곱은 육신의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축복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공적인 직무수행으로 자식들의 미래를 축복한 것이다.

그런 영유로 야곱의 유언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걸어왔던 믿음의 길이 12아들과 그의 후손들의 몫으로 ‘넘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아들들에게 한 예언과 축복이 실제 이뤄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걸어온 믿음의 길이 자손들의 몫이 된 것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첫째, 어느 한 사람으로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진행형이다. 둘째, 넘겨주고, 넘겨받는 관계가 ‘구원공동체’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셋째, 넘겨주고, 넘겨받는 관계 가운데 신적인 권위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예언 혹은 계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형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이 대표적이다. 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것도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복음 사역은 이렇게 어느 한 사람이 완성하거나 종결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진행형이다. 교회도 진행형이다. 정형화된 교회가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족장 시대에는 족장으로부터 신앙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오늘날은 어떻게 이어가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어간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대를 이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믿는 나는 믿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증언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증언의 소중함을 알기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라]”(골 4:5-6)고 했을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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