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재 형 목사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이루겠다는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의 목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갈 때 아브라함의 목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약속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는데 그 다음에 경영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기의 목적은 없이 다만 영광의 하나님을 믿고 그 지시하심을 따라서 갈 바를 모르고 그냥 순종하고 간 것뿐인데 아브라함에게 계획하신 모든 목적은 하나님이 이루었습니다. 모든 경영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눈은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에서 그 눈에 비늘이 벗겨졌다는 것처럼 우리의 잘못된 습성과 타성에 젖어있는 그러한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이 온전히 보여 질 수 있는 그러한 영적 눈으로 있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 난 뒤에 마귀의 또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는 그 굶주린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돌을 주면서 떡덩이로 만들어 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육신적인 요구를 가지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굶주리고 헐벗고 고생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 육신의 유혹 때문에 영적인 것을 던져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 육신적인 것들 때문에 혹은 먹는 것, 혹은 명예, 혹은 인간의 정욕 이러한 것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영적인 것 가장 귀한 것을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육신 적인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버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그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무엇이 보여 지느냐에 따라서 영적 싸움에서 승패가 결정되어집니다. 스데반이 그 돌에 맞아 가지고 죽어가면서 하나님우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가 비록 자기 동족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그 동족의 손에 들려있는 돌팔매를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우편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어마어마한 능력이 우리의 심령의 눈에 가득 채워져 있다면 비록 세상에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눈을 돌이키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30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10평 아파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면 이제 30평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러면 13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비록 고생이지만 장래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자기가 한 달 후에 들어간다는 확실하게 보이는 집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고생을 이깁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이 세상에서의 어떤 힘겨움,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하나님의 그 광대하심을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마저도 믿음의 과정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들로 감사하며 소망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간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원망하며 불평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모세와 같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항상 어떤 일에 원망하면서 불평하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일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갑시다.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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