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우리 역사에서 가장 웅장한 위세를 떨쳤던 ‘제국 고구려’가 대국 수와 당의 침공마저 막아낸 고구려가, 마지막에는 형제 싸움의 와중에 그야말로 허무하게 무너진 점에 대해서는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고구려 마지막을 장식한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지방을 순시하면서 그 동안 수도의 일은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맡아보게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현제를 이간질했다. 남건 등에게 “형이 당신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꺼린 나머지 당신들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고 하고, 남생에게는 “당신의 아우들이 모반을 꿈꾸고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곧이듣지 않던 형제들도 마침내 서로를 의심하게 되어T고, 남건 쪽에 심어 두었던 남생의 간첩이 발각되자 형제들 사이의 반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남건은 왕을 볼모로 실권을 차지하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공격했다. 남생은 당나라로 달아나, 그곳에서 동생을 즉 고구려를 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2년 뒤(668) 남생을 앞세운 당군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을 함락시켰다. 남건은 유배되고, 남생은 우위대장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고주몽’이래 몇 세기 동안 중국을 괴롭혔던 동방의 패자, 고구려의 최후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다소 왜곡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형우제공(兄友第恭’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등의 교훈을 역사의 에피소드마다 강조하는 유가적 역사서술법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남생, 남건 등의 반목이란 사실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던 고구려의 분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멸망은 한 집안 싸움 차원이 아니라 통일 중국과의 오랜 싸움에 따른 후유증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른데 따른다고 본다. 중요한 역사적 결정이라 해도 때로는 극히 단순하고, 개인적인 에피소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서에 서술된 표현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실을 그 뒤에 감추고 있을 때도 있다.(출처 : 108가지 결정)

제주 4.3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을 “진실(眞實)하게 밝히지 못함으로써 촉발된 것”은 아닐까? 그 사건을 유가족들은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으며,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자는 의미의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제주4·3평화공원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이루어 졌으며, 2014년 1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4.3희생자추념일’로 입법 예고함으로써,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주관행사로 치러지고 있다.(참고 : 위키백과) 물론 아직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논란이 끝이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생과 남건의 권력 싸움에 고구려가 망함으로, 분열은 국가를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일제에게 짓밟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의 고통이 이를 증명하기도 한다. 그럼으로 작금의 갈등과 반목이 우리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권력싸움으로 국민들이 희생당하는 ‘미쳐버린 세상’을 만들려 하지 말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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