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마련이다. 예수를 믿는 동기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다. 예수와 함께 한다면 암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원간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세상을 호령할 영광스러운 날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저들은 망설이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어부들은 배를 버렸고, 세리는 직업을 버렸다. 그던데, 어느 순간 상황이 반전되는 일이 벌어진다. 예수께서 수난의 길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제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과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근심스러운 제자들에게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않고 드러내서 아버지를 일러줄 때가 올 것이다.”(요 16:25).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수난을 통해서 알려주실 때가 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의 수난기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건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드러낸다. 동시에 자기 힘으로는 결코 씻을 수 없는 인간의 죄악과 역사의 불의를 폭로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낭만이 아닌 고난의 현실을 직면하도록 하신 것이다. 바로 ‘십자가 신앙’이다.

하지만 오늘날도 다를 게 없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저주받은 자의 형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십자가는 지옥문이었다. 그런 십자가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 사람이 있다. 바울이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인류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증표, 구원의 증표, 희망의 증표이다. 따라서 바울의 세계 인식은 십자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바울이 피조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낭만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울은 ‘당신이 나와 함께 이 복음의 열차를 타면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말하고, 시련을 말하고, 허무를 말한다. 썩어짐을 말하고, 고난을 말한다. 영광을 말하기는 하지만 오늘의 영광이 아닌 장래의 영광을 말한다. 희망을 말하기는 하지만 이생에서 잘사는 희망이 아닌 장래 이뤄질 희망을 말한다(롬 8:22-23). 분명 바울의 설교는 오늘날 교회들의 설교와는 다르다. 그는 인간의 현실에 대해 어떠한 가식이나 허례도 없이 진솔하게 말한다. 바로 십자가 신앙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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