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원리 교회지배

오늘 한국교회는 상업자본주의의 원리인 ‘돈’(맘몬)이 지배하고 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상업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어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개신교회의 현주소이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따라 교회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기계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일부 부자교회, 부자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오늘 한국개신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쉽게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성장론’이라는 바빌론포로에 사로잡혀, 미국 자본주의의 철저한 경영논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이것을 근본주의적이며, 전통주의라고 말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경건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목회자들은 정통적인 것만을 고집하다가 유럽교회가 경험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자본주의적 경영논리를 교회에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목회자는 철저하게 경영자가 되어야 하고, 설교도 사업광고처럼 선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철두철미하게 팽창과 성과에 최대목표를 두고 있으며, 미국식 자본주의의 본질과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한국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상업방송시간을 사서 설교하는 일이다.

기독교 TV 방송매체(유튜브 및 인터넷 방송매체 포함)들은 부자교회와 부자목사들을 찾아다니며, 설교방송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 빈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설교방송의 횟수가 목회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일부중소작은교회의 목회자들도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상업방송설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명함과 이력서에 어느 방송 설교자라고 여지없이 올린다. 방송설교도 하나의 감투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 교인들이 목회자의 능력과 자질을 교회의 사이즈와 유명세로 평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중소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도 방송매체의 설교방송 프로그램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방송설교 역시 미국의 유명 부흥사로부터 수입해 온 것이다.

문제는 방송설교가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자연스럽게 부추기고 있다는데 있다. 그 결과 부자교회는 계속해서 교인들이 몰려오는 반면,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것이 바로 신보수주의와 상업자본주의에 매몰돼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세속화된 사회에서의 정보 매체를 통한 복음전도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세속화나, 현대의 세속적 정보매체들은 그 속성상 가치가 중립적이지 않다. 자본주의라는 물질숭배 체제에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로마의 가톨릭이 그랬고, 종교개혁 후 콜럼버스의 세계화를 찬양하던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랬다. 콜럼버스가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라고 굳게 믿고 출발한 기독교의 세계선교는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한 것이다. 그것은 콜럼버스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아 <슈미켈>에 기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다.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램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맘몬 등장

이러한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정보 매체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의식 속에도 상업자본주의의 원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나라운동을 같은 동역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벌여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한마디로 동역자들을 상생의 목회자로 생각하기 보다도, 넘어야 할 경쟁자로 보는 인식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과거 교인들의 신앙과 심령의 각성을 목적으로 했던 부흥회는, 교인들의 양적 확대와 하나의 교회성장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지역주민들의 봉사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80-90년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부흥사 단체들은 대부분 유명무실해졌다. 대형집회도 사라졌다. 그것은 교회가 국민들의 의식에 배치되고, 개신교 목회자들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표본집계’ 중 종교분야 조사에서 개신교인이 가장 많다는 결과에 대해 위안을 갖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는 교인들이 늘었다는 말에 대해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교회마다 정부의 조사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럼에도 빛을 잃은 교회의 십자가 탑은 계속해서 높아만 가고 있다.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은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행동하는 모습은 보이지를 않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국개신교는 상업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선교초기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백성을 위한 선교에서 크게 이탈된 것은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이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이신 하나님나라운동을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의식화된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갈수록 ‘가나안교인’은 늘어나고 있다. 이들도 통계청의 조사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답했다.

상업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성장론’은 1970년대 S교단 Y교회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S교단은 이 방법을 통해서 교회성장의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급격한 성장을 이룬 Y교회는 다수의 지교회를 설립했다. 성장의 단계가 고조되었다가 침체에 접어들 시기에 한국 정통적 개신교회들이 Y교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국의 정통적인 교회들이 Y교회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이단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Y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97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개신교는 Y교회의 성장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Y교회 담임목사 목소리까지 흉내를 내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일어났다.

이것은 한마디로 정통적 목회만을 고집하다가는 유럽교회의 쇠퇴와 몰락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상업자본주의적 원리를 교회에 적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게 됐다. 한국교회는 ‘돈’이 ‘신’이 되어버렸으며, 여기에서 탈락한 교인들은 스스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를 비방하는 노래까지 나왔다.

“돈!돈!돈! 돈의 돈!돈! 악마의 금전------”

구역장을 통해 교인 관리 및 통제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교인들의 교제를 위한 구역의 구역장은 교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구역을 통한 교인 훈련프로그램은 기업체가 운영하는 다단계의 점조직처럼 비쳐지고 있다. 이 조직을 통한 새교인 훈련 프로그램은 신입회원 교육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형교회 당회장은 대기업의 회장에 비유되고, 부목사는 사장에, 전도사와 구역장을 지사장이나, 지점장에 비교한다. 대기업이나, 은행이 지점을 내듯이 일부 대형교회들은 Y교회를 이어 지교회와 지성전을 내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 지교회와 지성전은 담당목사가 자율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최고 관리자인 당회장의 전권에 의해 움직인다.

이런 대형교회들의 조직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힘은 맘몬이다. 돈이 없으면 교회의 거대조직을 움직일 수 없다. 이런 교회의 담임목사는 세련된 신학적 논리로 ‘돈의 위력’을 입증한다.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돈으로 총회장도, 단체장도 살 수 있다. 돈에 익숙해진 총대들은 돈을 쫓아다니며,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린다. 모교단의 목사는 100억원을 선거비용으로 쓰고서도 교단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장로교의 한교단은 20억원을 써야 총회장에 당선될 수 있다는 말은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다.

어떤 부자교회의 목사는 억대의 돈을 내놓으면서 기념집회의 설교를 한다. 이 돈은 어디에 쓰여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행사의 계획서와 지출에 대한 영수증, 그리고 증빙서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일들은 모두 은혜로 넘어간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이것이 오늘 상업자본주의의 원리인 맘몬(돈)에 길들여진 한국개신교의 자화상이다.

2004년 CBS에 출연한 한 목사는 ‘하나님의 속성 중 전능성’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 목사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고, 율리우스 시저의 말대로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고, 처질이 말하듯이 대통령이 강한 것도 아니며, 오직 돈만이 강하다”면서, “로마의 장군 시저도,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사라졌지만 돈의 능력은 사라진 적이 없다”고 했다.

상업자본주의 원리가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는 오늘, 돈만 있으면 모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다. 권력도 사고, 성직도 사고, 총회장도 사고, 연합회장에도 올라갈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나라도, 기업도, 교회도 운영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선교도 할 수 있다. 교회도 건축 할 수 있다.

이 목사의 말대로 돈만큼 강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돈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 설교는 어찌 보면 자신의 양심을 고백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지역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들에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목사의 설교내용은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목사의 설교라는데 이의가 없다.

부자교회 대물림 하는 시대

무능력한 목사가 부자 목사아버지를 만나 교회를 세습하면 능력자이다. 교회에서 힘깨나 쓰는 장로나, 교인들도 그 앞에 서면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담임목사 세습은 대형교회를 넘어 중형교회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아무리 공부 잘하고, 머리가 좋아도 돈이 없으면, 상놈이다. 공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해도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양반이 된다. 가문이 양반을 만드는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돈이 양반을 만든다.

푼돈을 받은 정치인, 선생, 기자들은 철장신세를 지지만, 어마어마한 정치자금을 준 기업가들은 법망을 피해간다. 1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목사는 목숨을 부지하지만, 이 비자금의 일부를 자기 것처럼 사용한 장로는, 자신이 사용한 돈을 채워놓을 길이 막막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는다. 그리고 쉬!쉬! 한다. 돈만 있으며, 일치운동은 몰라도 연합회 회장이 된다. 총회장도 된다. 권력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예수님은 돈에 대한 속성을 잘 알았다. 부자청년을 향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또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본주의 시대에 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의 속성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가 세운 교회에서도 돈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한국개신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신앙이 있다고 해서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돈이 없으면 장로가 안된다. 돈이 있어야 한다. 어느 교회는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1억원을 내야 한다. 어느 교회는 적어도 3천만원에서 1천만원을 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1천만원짜리 장로, 3천만원짜지 장로, 1억원짜리 장로라고 부른다. 헌금을 내겠다고 하고서 먼저 안수를 받고서 약속을 못 지킨 장로는 ‘외상장로’라고 부른다. 돈의 액수에 따라 장로의 등급이 매겨진다. 또한 권사도 얼마의 돈을 내야 취임할 수 있다. 한마디로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예수님과 그의 정신이 아니다.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배척했던 돈(맘몬)이다.

맘몬에 길들여진 교회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제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24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사제들에게서 돈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를 보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었다. 이 말에 당황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늘도 교회들이, 아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같은 가르침에 대해 비웃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고자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대적 전환기, 새시대, 하나님나라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청지기의 비유를 들어 교훈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채무를 삭감해 준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삼는다. 불확실해진 미래를 준비한다. 여기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맘몬을 버리고, 이웃들과 다가오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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