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출애굽 사건 기사 가운데 “내가 넘어가리니”(출 12:13)라는 말씀이 있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는 말이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 죽음에서 삶으로 넘어간 사건을 자자손손 기억하기 위해서 특별한 절기를 제정하여 기념한다. 유월절이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 저들은 유월절을 한 해의 시작점으로 삼기까지 했다. 한 해 시작이 되는 달은 아빕월(니산월)이다. ‘아빕’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생명 곧 ‘이삭’을 뜻한다. 시간적인 시작이 아닌 생명으로 인한 시작이다. 이삭은 씨앗의 죽음을 통한 결실이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가 그랬다. 그의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결실이다. 부활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기운에서 생명의 기운을 타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처럼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과도 관련이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했다. 접속부정사 “그러나”에는 이 생 즉 눈앞의 생에만 매달려 사는 삶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땅에 묻히는 씨앗이기를 부정하고 화려한 꽃이 되기를 바라는 삶, 겸허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고 주목받게 되기를 열망하는 삶, 섬김의 삶을 살지 않고 매사에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삶,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허세를 부리며 살고자 하는 삶. 이 모두가 “그러나”에 걸려 넘어지는 삶이다. 바울은 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자문한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31)라고도 한다. 바울에게서 부활은 반듯이 성취해야 할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한다.

부활을 사는 이들은 죽음 가운데 있는 생명들과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다. 자기 몫이 적을 지라도 가난한 이들의 몫을 빼앗지 않는다. 자기희생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낸다. 그리하여 부활을 사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다. 그들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 반대로 죽음을 사는 이들은 죽음의 독한 기운을 뿜어낸다. 그들은 온갖 불의의 열매를 맺는다. 부활이 무엇인지 지금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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