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유약하고 무능한 지극히 정치적인 왕이었다. 20여일 만에 한양을 빼앗기고 몽진을 고민하던 선조였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신하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벤저스급 이었다. 서애 유성룡, 충무공 이순신, 행주산성의 명장 권율 등등은 조선의 역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운 영웅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가장 참혹한 역사를 쓰고야 말았다. 그래서 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임금은 무치(無恥)라고 했다. 아무리 포악한 학정을 저질러도 왕이기에 정당했고, 주변에는 당대의 유력자들이 한결같이 ‘천세’를 외치며 비행을 정당화하고 폭정을 도왔다. 물론 죽음의 화를 각오한 간쟁(諫諍)과 직언을 고한 충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역사에서는 그들조차 왕의 학정과 부역자들의 횡포를 막지는 못하였다.

신하가 뛰어나도 왕이 어리석으면 불행해진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이 시대에도 적용하기가 무리는 아닌 듯하다. 오늘날만큼 뛰어난 인재가 많았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처럼 평민과 사회단체가 힘을 발휘하고 국정을 감시하던 시대가 있었는가? 그 어느 때보다 언로(言路)가 열리고 개방된 광명한 시대가 있었는가? 우리 손으로 통치자를 뽑았던 시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시대가 없었다는 말인 왜 과거 폭군의 시절에 겪었던 고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승만의 건국으로부터 최근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모신 이 시대의 제왕적 대통령의 통치아래 살면서, 왜 우리는 자랑할 만한 통치자를 가져보지 못했을까? 서애같은 재상도 있고, 충무공 같은 장수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선조와 같은 무능, 유약, 독선, 독재의 통치자만 기억되는 것일까? 그들에게서 장점도 있었고 통치 업적도 있었다. 폭정이라고 업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역사는 폭군의 선정과 업적을 악어의 눈물 정도로 평가한다. 역대 대통령들을 자랑핮 못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실정(失政)이 더 크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최고 덕목은 인재등용에 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가 임명한 육군장관은 후보시절 자신을 가장 강력하고 야비하게 비난했던 스탁턴이었다. 주변 참모들이 그의 임명을 극렬하게 말렸지만 링컨은 “그는 최고의 육군장관감입니다”라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링컨이 두고두고 역사에서 칭찬받는 것은 이런 통치덕목 때문이다. 아무리 어벤저스급 인재일지라도 그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는 용병술이라면, 국난은 예견된 것이고, 국난은 그 신하들과 힘없는 민초들의 몫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에 이토록 훌륭한 시설과 기반과 인재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통치자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르는 피해는 우리가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세워질 통치자의 자질이 부족한 신하조차도 어벤저스급으로 만들 수 있는 통치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왕의 선택권이 백성들에게 없었으나 지금은 통치자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하고, 만일 이번 선거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그 허물은 억울해도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새삼 지도자의 인성과 인격을 고민한다. 어차피 우리가 뽑은 대통령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 선택의 기준은 단 하나뿐이다. 그들이 유세장을 돌며 한 그들의 공약과 주장과 비젼도 중요하지만, 정작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은 후보자의 과거 주장과 행동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등이다. 통치자로서의 개인적 신념과 사상은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아침에 바뀔 신념과 사상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고, 또 하루아침에 바뀔 신념과 사상이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보자들이 해야 할 정직한 공약은 과거 자신의 행적을 설명하고, 그런한 자신의 과거 행전을 바탕으로 집권 후 행할 것들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과거 행적을 살핀 후 그들의 공약이 실천 가능할 것인지를 판단하고 투표하는 일일 것이다. 모두 투표장으로 나가자.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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